천상천하 유아독존

by 캄프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이 말의 출처나 기원을 모르는 사람은 많겠지만 이 말을 못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실 이는 석가가 태어나면서 했다는 말로 전체 문구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이다. 풀이를 하자면 '하늘과 땅사이에 오로지 나만이 존귀하며 세상이 고통이니 마땅히 편안하게 하리라'라는 뜻이다. 앞의 문구에서 마지막 한자를 존재할 존(存)으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의미로 해석하건 직해는 굉장히 오만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문구의 정확한 의미는 오만함과는 거리가 있다.


여기서 '나(我)'라는 말은 단순히 석가 본인을 지칭하는 말이라기보다는 각각의 개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이는 자의적으로 의미를 확대하거나 오역하는 게 아닌 것이 불교 이론에 따르면 각 개인들은 불성(佛性 - 부처가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우리 각자는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지만 홀로(각 개개인이) 존귀한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면 우리 각자는 각각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각자의 감정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함께 같은 영화를 보고 비슷한 감상평을 내놓는다고 해서 실제 감상이 같다는 보장은 할 수 없으며 실제로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이는 단순이 감정과 생각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감각 역시 상대적일 수 있다. 동일한 자극이면, 예를 들어 같은 음식을 먹는다면, 같은 맛을 느낀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자극을 표현하는 언어가 같다고 실제 우리가 느끼는 자극이 같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우리의 언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은 이렇게 표현한다'라고 규정한 약속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를 '사람은 느끼고 생각하는 게 서로 다르다'라고 명제화 하면 부정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다름을 어느 범주까지로 규정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의 관대함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다름의 인정은 다양성으로 이어져야 한다. 생각의 다양성, 행동의 다양성, 삶의 자세에 대한 다양성, 삶의 방식에 대한 다양성으로 발현돼야 한다. 과거에 비해 일부 영역에서 우리는 다양성을 확보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이 이해의 폭이 넓어져서라고만 보기에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상황과 조건이 바뀌어 다양한 현상이 발생하면서 충족된 것이다. 예컨대 1인 가구수의 증가와 같은 현상이 그것이다.


우리가 각자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면 서로에게 완전히 공감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게 고립을 의미하거나 고립을 당연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공감하는 것은 힘들 수 있지만 그게 이해할 수 없다는 말과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해라는 것은 상대의 말을 듣고, 대화를 통해 그 말이 나오는 맥락을 파악하면 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로가 충분히 말하려고 하고 충분히 들으려고 하면 가능한 영역의 일이다.


한 가지 더 필요한 전제 조건이 있다. 상대의 말을 듣고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 그러한 노력이다. 하지만 작금의 모든 사회에서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도 이 '생각하는 것'의 부재가 빈번히 발생한다. 불과 10여 년 전과 비교를 해도 지금의 우리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도로 많은 정보에 매일같이 노출되고 있다. 20여 년 전에 우리는 그 방대한 정보에서 밝은 미래를 그렸지만 실제로 드러난 현실은 생각하지 않는 개인이었다. 방대한 양의 정보는 맥락이 아니라 파편으로 생산되고 공유됐고, 심지어 맥락으로 존재하는 정보가 파편화되어 재생산되고 있다. 맥락이 누락된 정보는 진실을 곡해할 수 있음에도 진실로 포장되어 유통되고 있고 이는 편견이나 확증편향을 야기하며 사람들에게 생각할 여지보다는 판단할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


때문에 이를 소비하는 '유저'들은 이러한 파편화된 정보로 확립된 지식이나 상식으로 규정(規定) 한다. 이러한 규정은 도덕이나 정의의 탈을 쓰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런 규정들은 굉장히 세세한 개인의 행동 양식을 비판의 요소로 삼게 만든다. 그럼 이런 '규정'이 충분히 보편적이며 그 '정의'의 실천이 실제로 정의로우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이런 정의의 실천은 두 가지 주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바로 기계적이며 공격적이라는 점이다.


무언가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대체로 매우 쉽다 그리고 때때로 매우 정의롭지 않다. 예컨대 '군인을 비하하는 것은 나쁘다.' 거나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와 같은 명제를 나쁘다고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적용되는 방식은 매우 정의롭지 못한 경우가 생긴다. 한 여성 방송인이 '군인과 연애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라고 하거나 방송 공지를 남긴 인터넷 방송인이 그 공지와 다르게 방송을 진행하면 욕을 먹는다. 심지어 그 발언의 의도가 군인 비하의 의도가 아니었으며 변경된 일정을 본인의 방송에서 여러 차례 재공지를 했음에도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게다가 그 '잘못한 자들'의 대응이 '굴복'이 아니라면 이는 '척결'의 대상이 된다. 부정의 하다고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로 빈번하게 벌어지는 현상이고 이를 통해 그들만의, 하지만 굉장히 광범위하게 문화적 트렌드를 형성하는 규범이 만들어지고 있다.


부정의가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것의 근본적 원인은 '생각하지 않음'이다. 그리고 맥락은 다르지만 이는 그 유명한 사회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도 언급된 내용이다.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은 나치 치하에서 유태인 수백만명의 수송을 담당한 실무 책임자였다. 이 사람에 대한 전범 재판이 예루살렘에서 있었고 아렌트는 이를 참관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절대악이라고 생각했던 아이히만은 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개인이었고 아렌트는 이후 앞서 언급한 저서를 통해 이를 분석한다.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도 이 책에서 언급된 것으로 이러한 부정의가 가능한 이유를 아렌트는 '무사유(Thoughtlessness)'라고 결론짓는다.


무사유는 지적 능력과는 독립적이다. 지적 능력이 낮아서 무사유를 하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무사유가 부정의를 낳는 가장 근본적 원인은 비판 없는 순응 때문이다. 학식이 높아도 무언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 이는 부정의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이었지만 당시 독일의 법과 자기 도덕의 자율성에 대한 고민, 그리고 자신의 일처리로 인해 사람들이 처하게 될 상황, 처지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결국 그를 괴물로 만든 것이었다. 쉬운 것에 정의는 없다.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해하려고 않는 상황에서 정의를 논하는 것 또한 의미가 없다.


무사유는 부정의를 낳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앞서 언급한 다양성을 무참하게 짓밟는다. 획일화는 민주제 사회에서 부정의만큼 나쁜 것이다. 아주 파편화된 정의, 부정의를 가지고 내려지는 규정을 타파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하는 힘이다. 공감과 이해는 절대적으로 다르다. 공감은 연대를 강화하지만 이해는 갈등을 약화시킨다. 공감은 비슷한 우주를 공유해야 하지만 이해는 다른 우주 속에 있더라도 충분히 가능하다. 공감은 정의가 발현할 힘을 주지만 이해는 정의를 안착하게 한다. 이야기하는 것과 듣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은 다양하게 존재하는 각각의 우주가 고립으로 가지 않게 하는 유일한 장치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생각하는 길은 우리 모두를 위한, 모두에 의한, 모두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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