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냐건
웃지요
-남으로 창을 내겠소(김상용作) 中-
누군가가 저 질문을 하면 대부분 '행복해지려고 산다.'는 대답을 할 것이다. 여기에 변주를 줘 요즘은 '뭐 할 때 제일 행복해요?'라는 질문도 많이 한다. 사람은 응당 행복하려고 산다는 전제를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우리는 이렇듯 늘 행복을 추구하고 그렇게 행복이 가득한 삶은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한다.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행복이라는 가치를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아주 높은 수준의 긍정적 심리 상태를 말한다. 행복이라는 감정이 없는 삶이 유지나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이걸 추구하는 삶을 재고해야 한다는 말은 이 심리 상태가 지속가능하냐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행복은 특정 순간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이고 다른 모든 감정이 그렇듯 사람마다 서로 다르게 느끼는 상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은 우리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지 않는, 지속될 수 없는 감정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목표로 삼아 여기에 나름의 기준을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그걸 위해 노력을 한다. 순간의 행복(목표)을 쟁취해도 이는 지속되지 않는다. 그 자체로도 의미는 있지만 우리에게 이것은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 감정이 사그라져 가면 허망함을 느끼기도 한다. 게다가 계획이라는 것이 늘 변수가 생기기 마련인 것이고 노력을 한다고 늘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닌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복은 늘 저 멀리 있는 듯 보인다.
행복을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표준국어대사전)'을 느끼는 상태다. 만족과 기쁨을 키워드로 기준을 삼으려 해도 이 두 가지 또한 명확한 기준이 있지는 않다. 그나마 기쁨은 시쳇말로 '도파민 터지는' 일로 기준을 삼을 수 있고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행복 추구가 쉽지 않으니 요즘 들어 이 도파민을 추구하는 일이 많이 생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만족은 여전히 기준을 잡기 힘들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만족할 수 있을까? 원하는 만큼의 자본을 소유하면 만족할까? 만약 한 사회에서 구성원들에게 무한한 자본을 제공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굉장히 높은 수준에서 평등이 이뤄진 사회에서도 우리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그런 사회들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인류가 '적정한' 수준에서 만족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다면 역사에 기록된 그 수많은 전쟁과 갈등들 대부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그렇게 쉽게 만족했다면 지금의 문명 수준을 이룩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만족이라는 가치는 이렇게 양면적 요소를 지니고 있고 달성하기 매우 어렵다. 우리도 일상에서 흔히 말하듯 인간의 욕심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인간의 욕망을, 혹은 과도한 욕망 추구를 죄악시하고 절제를 중시하는 이유는 이유는 과욕이 실제로 도덕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인간을 파멸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니 답이 보이는 듯하다. 우리의 기준을 낮추면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욕심을 버리고 만족하는 삶을 실천하면 우리의 인생은 반대로 충만해지지 않을까? 일시적으로는 그런 감정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네 일반적인 삶은 그것 또한 가능하지 않다.
I don't wanna hurt no more.
...
I don't wanna cry no more.
So I set my bar real low.
...
Don't you love it?
No, I ain't happy yet.
But I'm way less sad.
난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
....
난 더 이상 울고 싶지 않아.
그래서 기준을 아주 낮췄지.
....
그거 좋지 않아?
아니, 아직 행복하지는 않아.
하지만 덜 슬퍼.
-Way less sad (by AJR)-
불교에서 인생은 '고(苦)'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우리의 끊임없는 욕망과 욕구로 만족상태에 도달하지 못해 고통 속에 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을 차용한다면 우리가 절제를 하고 아주 낮은 기준을 적용한다고 해도 인생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닌 위 노랫말처럼 덜 슬퍼지는(고통스러워지는) 상태가 될 뿐이다. 우리는 육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욕망과 욕구가 발생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비관론이나 허무주의적 이야기가 아니다. 기준을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행복은 점과 같은 것이다. 점을 이어 붙이면 선이 되는 것은 맞지만 그렇게 합쳐진 행복의 집합이 진정한 행복이 될까? 인간의 감각과 감정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지 않다. 단맛을 좋아해서 단맛이 나는 음식만 먹는다면 나중에 혀는 단 맛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반대로 쓴맛을 보다 아주 약하더라도 단맛을 본다면 훨씬 더 달게 느껴지는 것이 이치다.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처럼 모두가 '행복해지고 싶다'라고 목표를 삼는 경우는 그렇게 흔치 않은 거 같다. 그리고 심지어 그런 나라가 전 연령대 자살률 전 세계 1위를 기록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결과에 여러 가지 분석을 붙일 수 있지만 인생관이라는 측면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준에 문제는 없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삶은 기본적으로 쓴맛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쓴맛을 중화시키기 위한 단맛을 군데군데 배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오히려 쓴맛에 익숙해져야 진짜 단맛도 느낄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는 게 더 본질에 부합하는 것은 아닐까?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다른 시구절을 보면 밭을 갈고 김을 맨다는 구절처럼 인생의 고단함을 표현한 묘사들이 나온다. 반면 긍정적인 요소는 '고작' 새소리와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 정도다. 고단한 길을 걸어감에 있어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나 현실을 부정하고 개선된 이상향적 미래만을 바라본다면 그 노력이 결실을 보지 못했을 때 우리 앞에 놓이게 되는 건 좌절뿐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