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에 대한 소고

by 캄프카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는 문구는 어느새 우리 생활 깊숙한 곳에 들어와 심지어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무식한 것은 죄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변용되어 쓰이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그것도 몰라?'와 같은 반응을 농담이든 진담이든 자주 듣게 된다. 한국은 모른다는 것이 흉처럼 인식되는 사회다. 무지에 대한 조롱이나 놀림, 혹은 무시가 횡횡하니 이런 관점에서 무지를 방어하는 논리로 위와 같은 말이 나온다고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왜 우리는 이토록 무식을 폄하할까? 한국에서 지식은 도구화되어 수단으로 쓰인 역사가 길다. 도구는 더 좋은 것과 더 나쁜 것이 구분된다. 한국은 통계적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 수준을 보여준다. 이는 많은 구성원이 높은 수준의 지적능력을 갖췄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치열한 경쟁으로 유명한 이 사회에서 대부분이 높은 지적능력을 갖췄다면 지식의 부족이라는 것은 상대적 열등과 약점을 의미하게 된다.


본디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는 문구는 '논어(論語)'의 '공야장(公冶長)'에서 유래한다. 제자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공문자(孔文子)라는 이가 왜 문(文)이라고 불리냐고 묻자 공자는 그(공문자)가 '민첩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敏而好學민이호학 不恥下問불치하문)'라고 답했다. 이 문구의 不恥下問(불치하문,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을 차용해 앞선 문구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언가 핀트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문은 공문자라는 사람이 배움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의미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문구는 마치 배우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미로 활용된다. 이 문구와 함께 같이 애용되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말도 소크라테스가 한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라는 말에서 온 것인데, 이 원문 역시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에서 지혜를 추구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지 몰라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孔子曰 공자왈 : 공자가 말했다.

生而知之者上也 생이지지자상야 : 태어나면서 아는 사람이 최고이며

學而知之者次也 학이지지자차야 : 배워서 알게 되는 사람은 그다음이며

困而學之又其次也 곤이학지우기차야 : 부족함을 느껴 배우는 사람은 그다음이며

困而不學民斯爲下矣 곤이불학민사위하의 : 부족함을 느끼는데 배우지 않는 사람은 가장 아래다.

-논어 계씨(季氏) 中-



이 말들에 굳이 파고드는 이유는 이들을 활용해 무지의 폄하를 방어하는데 그치지 않고 배우지 않음을 정당화하는 경우들이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지금과 같이 검색엔진이 발달하고 스마트폰의 활용으로 아무런 제약 없이 검색엔진에 접근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인공지능까지 활용하는 시대에 지식의 습득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지식은 필요할 때 가져다 쓸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 이런 생각이야 말로 지식을 도구로 생각하는 태도이고 결국 지식을 악용해 온 비루한 식자들의 관점으로 연결될 수 있지만 우리는 이를 타당하다고 여기곤 한다.



인간에게는 호기심... 아는 기쁨이 있습니다. 인간은 평생 배우고 또 배워야 합니다. 이력을 쌓거나 출세하여 장관이 되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 계속 배워야 할까요?... 그것이 인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마스터키튼(Master Keaton) (by 浦沢 直樹 우라사와 나오키) 中-



지식은 물론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 특히 특정분야의 전문지식은 그렇게 활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지식의 습득과 추구, 즉 배움은 그 자체로 인생의 목적 중 하나이며 우리가 그렇게 여기지 않더라도 그래야만 한다.


지식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공부를 통해 얻은 지식과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표현은 따로 없다. 독일어의 경우 전자, 즉 공부를 통해 안다고 하는 동사를 wissen이라고 쓰고 후자를 kennen이라고 쓴다. 학습과 경험, 양쪽에서 축적된 것이 지식이다. 그리고 두 과정 모두 우리도 배움이라고 부른다. 공부를 통해 얻는 지식은 보편성을 띤다. 학문적인 지식 중 상당수는 경험적 지식을 증명이나 실험으로 객관화한 것들이고, 해석에서 보편적 약속이 이뤄진 형이상학적 지식들이다. 그럼에도 이 지식들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는 일정정도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어떤 형태의 지식이건 우리의 감각 기관을 거쳐서 수용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식을 늘 추구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식은 늘 변한다. 내용이 변하지 않더라도 해석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이를 받아들이는 우리가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불변의 진리는 존재할 수 없다. 더불어 한 번 습득한 지식을 다시 습득하는 것도 무의미하지 않다. 새로 습득하는 지식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지식의 의미가 달라지면 그 지식의 활용 또한 달라지게 된다. 지식의 활용은 삶의 양태에 영향을 주는데 이게 변화한다면 결국 삶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식은 또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는 폭을 넓힐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인지의 수준을 높일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학습을 통해 우리는 경험을 통한 것 이상의 지식을 알게 되고 이를 통해 세상에 대한 인지 수준을 올릴 수 있다. 이 '세상'이라는 건 자연현상을 비롯해 인류가 유무형적으로 구축해 온 문화나 시스템이 포함되어 있고 인간의 심리나 욕망에 대한 것들 또한 들어있다. 이렇게 세상에 대한 인지가 넓어지면서 이전에는 스스로 이해하거나 인지하지 못한 나의 모습도 이해하게 되는, 즉 요즘 흔히 하는 말로 메타인지가 넓어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더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나 스스로에 대한 인지가 달라지면 다시금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깊이가 달라지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인지에도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도인', '성인군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순환 구조를 말하더라도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라고 반응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국가가 취하고 있는 통치 시스템이 민주제라는 것 때문에 이러한 개인의 변화는 큰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상대방과 세상을 더 잘 이해한다면,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부분, 특히 자신의 욕망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면 이를 조절, 조정하는 것에 더욱 수월해지게 된다. 당연히 이런 상황은 민주제 사회에서 더 높은 차원의 담론이 오갈 수 있게 하거나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게 우리가 배움을 추구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다.


우리는 흔히 '그걸 내가 알 필요가 있나?'라거나 '그런 것까지 내가 알아야 해?'라는 말을 하곤 한다. 다른 영역에서 우리가 자주 그러듯 지식이 습득도 효율적으로 하고 싶어 한다. 그 효율이라는 것은 나에게 '필요한' 지식을 '빠르게' 얻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어떤 지식이 필요할지 안 할지는 현재의 시점에서는 판단할 수 없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에 종지부가 찍힐 때서야 그 지식이 필요했는지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현시점 기준으로 필요를 정할 수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서는 '부족함을 느껴서 배우는' 처지를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 그 효율을 추구하는 것이 누군가보다 빠르게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지식에 대한 이런 태도로는 그 또한 절대로 도달하지 못할 목표가 될 것이다.


모두가 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내 주변과 생활 속에서 이해되지 않거나 모르는 일들이 흘러가거나 지나갈 때 그걸 그대로 보내지 않고 알아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지식의 습득은, 배움이라는 것은 단순히 내 지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을 넘어 세상과 타인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더불어 나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 나와 사회에 모두 긍정적인 작용을 하게 된다. 편안함과 효율은 이 과정을 '구시대적'인 것으로 만들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이 가지고 오는 효용에는 늘 대가가 따르며 그 대가는 늘 우리에게 치명적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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