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텍스트는 일반적으로 글을 의미한다. 때문에 우리가 공부를 하거나 독서를 할 때에만 접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학창 시절 이후에 공부라는 것을 해보지 않았고 독서를 취미로 하지 않기 때문에 텍스트라는 것을 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조금 다른 케이스로 자신이 텍스트를 선호하지 않거나 친숙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작금의 시대는 영상매체의 시대이니 텍스트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콘텐츠의 기반은 텍스트이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자면 영상물을 제작할 때 보통은 대본(스크립트 script)을 작성하고 그걸 기초로 해서 촬영이 이뤄진다. 콘텐츠와 텍스트의 관계를 조금 더 확장해서 보면 거의 모든 콘텐츠에는 각자의 기호와 상징이 사용되고 있고 이는 기본적으로 해석의 여지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텍스트의 성격과 동일하다. 때문에 우리가 접하는 모든 콘텐츠 역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방금 언급했듯 콘텐츠들(텍스트들)에는 늘 해석의 여지가 존재한다. 텍스트에는 작성자의 의도가 담겨있고 그것이 작성되고 공개되기 전까지는 폐쇄적 성격(작성자만의 해석과 의도)을 지니지만 그것이 읽히는 과정에서 이는 다시 무한하게 다양한 이해와 해석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혹자들은 콘텐츠, 특히 문화 콘텐츠의 해석을 불필요하거나 오히려 '감상'이라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로 보기도 한다. 최근에도 어떤 해석적 접근이나 평론가들의 분석을, 특히 일반 대중의 감상과 동떨어져 있을 때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엘리트주의적' 감상이라고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뤄지는 해석의 배제는, 후술 할 내용이기도 한, 작금의 극도로 단순화된 감상의 영역에서 콘텐츠를 재밌거나 재미없는(그래서 '쓰레기'라고도 불리는), 흑백의 상황에 놓이게 만들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자주 있어왔고 최근에도 종종 발생하는 독재적 통치 권력의 미화로 활용되는 문화 콘텐츠에 대한 평가를 긍정적으로 내리게 되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텍스트의 의미가 지나치게 한정적이다 보니, 텍스트와 맥락(콘텍스트 context)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경우도 드물다. 텍스트는 라틴어 texere에서 온 말로 '직물' 혹은 '짜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콘텍스트는 contexere에서 유래했는데 '함께 짜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어원은 텍스트의 본질을 잘 설명한다. 텍스트는 늘 어떤 맥락 속에 존재하며 그 맥락을 고려하지 않거나 배제하면 제대로 된 텍스트의 해석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맥락을 잘못 파악해서 텍스트의 해석을 잘못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
최근 우리가 소비하는 텍스트는 대체로 특정 경향을 따르고 있다. 일단 쉬워야 한다. 글이라면 술술 읽혀야 한다. 이는 문체에 달려있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다루는 주제나 내용이 가벼워야 한다. 이는 영상 콘텐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다음은 간단해야 한다. 앞의 내용과 연결되기도 하지만 글이나 영상의 구조가 복잡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짧아야 한다. 대체로 긴 콘텐츠는 앞선 두 개의 요소를 포함한다는 선입견을 준다. 심지어 요즘은 영상 콘텐츠들도 '숏폼', '릴스'라는 이름으로 매우 짧아 일시적으로 소비되는 형태가 많아지고 있다.
Where's the truth in the written word, if no one reads it?
누구도 읽지 않는다면 쓰인 글 어디에 진실이 있을까?
-Troubled Time (by Greenday)-
글을 공유하는 이곳 브런치에도 짧은 형태의 글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눈에 뜨인다. 그리고 쉽게 읽히는 글들의 비율도 늘어나는 듯하다. 그러한 글들의 퀄리티가 낮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반대적 성격을 지닌 글들이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이야기다. 누구도 읽지 않고 보지 않는 콘텐츠는 해석의 영역으로 들어가지 조차 못한다. 그렇다면 읽히기 위해 우리는 형태와 방식을 바꿔야 할까? 현시점에서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의 모든 콘텐츠는 '소비'되고 있다. 누군가는 이 표현을 의아해할지 모른다. 소비되지 않는 콘텐츠가 있었나? 여기서 '소비되는 콘텐츠'가 갖는 의미는 해석되지 않고 재밌고/재미없고(혹은 유용하고/유용하지 않고)의 영역에서만 그 가치를 평가받으며 그 후에 버려지는 콘텐츠를 말한다. 이런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생산자들'은 텍스트 작성시기부터 본래라면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의미나 의도의 영역을 제거한 체 그 자리를 트렌드로 채워 '차용한 텍스트'를 생산한다. 이는 텍스트가 해석의 영역에 들어갈 가능성은 애초에 배제하는 것이고 콘텐츠가 의미의 확장이나 이를 통해 재생산이 될 여지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로지 이 콘텐츠로 얼마만큼의 수익을 창출할 것이냐, 얼마만큼의 화제성을 불러올 것이냐의 고민만 존재한다.
We don't read and write poetry because it's cute.
We read and write poetry because we are members of the human race.
"우리는 시가 매력적이기 때문에 읽거나 쓰는 것이 아니야. 우리가 인류의 구성원이기 때문이야."
- 죽은 시인의 사회 (Dead Poets Society) 中-
생산자는 수요를 따라갈 뿐이다. 이를 소비하는 우리가 별다른 생각이 없다는 게 어쩌면 근본적 문제일 수 있다. 최근의 우리를 보면 콘텐츠를 소비함에 있어서 생각을 하기보다는 훨씬 더 쉬운 영역에 있는 평가만을 하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콘텐츠를 접하면서 생각을 하고 싶어 하지 않기도 한다. 텍스트를 해석한다는 것은 앞서도 언급한 맥락의 흐름에서 텍스트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많은 사유를 요구하는 복잡한 일이다. 따라서 '현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느리고 당장의 효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즉, 비효율적이다.
이전의 글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쉬운 것이나 간단한 것이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니고 때로는 필요한 요소이지만 이들이 언제고 문제가 될 수 있음은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무사유(Thoughtless)는 '부정의'를 야기하는 핵심 요소다. 더군다나 맥락이 거세된 텍스트는 늘 오염된 해석의 위험성에 놓이게 되며 이렇게 잘못 해석된 텍스트들은 다시금 쉽게 잘못된 맥락으로 이어져 더 큰 가짜 사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최근 거의 모든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가짜 뉴스의 문제는 이미 이 단계에 접어들었다. 단순히 하나의 사실 단위를 조작하거나 잘못된 해석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연결해 거대한 맥락을 만들어 내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 문제의 원인 중 하나로 SNS을 포함한 인터넷 콘텐츠 플랫폼을 지목하고 있는 것처럼 이 과정은 현재 우리가 대부분의 콘텐츠를 소비하는 그곳들에서 벌어지고 있다. 자신의 지적 능력으로는 그러한 것들에 휘둘리지 않을 거라 너무 자신하면 안 된다. 그건 지식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내가 편하고 쉬운 방식으로 텍스트를 '소비'하고 있다면 나도 언제든 거기에 휘둘릴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