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성의 두 얼굴

by 캄프카

우리의 감정은 늘 여러 자극에 의해 변화한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그 변화무쌍하던 감정이 맹목성을 띄게 될 때가 있다. 바로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반하면 맹목적으로 그 상대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떤 맹목성은 아주 부정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우리가 맹목성을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특징에는 어떤 게 있을까?


사랑의 대척점에 있는 행위 중 하나를 꼽자면 스토킹을 들 수 있다. 이는 심지어 범죄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사랑과 스토킹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떤 요소로 이를 구분 지을 수 있냐고 묻는다면 선뜻 답이 안 나올 수도 있다.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감정에는 여러 복합적 요소가 작용하고 우리는 이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구체적인 것 하나를 꼽아 보자면 관계나 감정 상태가 '상호적'인가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상호적이라는 말 또한 쉽게 이해가 되는 듯하다가도 구체적 상황에 들어가면 역시나 모호해지는 경우가 있다.



미성숙한 사랑은 '나는 당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말한다. 성숙한 사랑은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사랑의 기술(1956, by Erich Fromm 에리히 프롬)-



상호성을 크게 분류해 보면 관계를 서로 동의했느냐 차원에서의 상호성이 있고(동의적 상호성), 서로가 상대를 인격채로 인정하고 대우하느냐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상호성이 있다(인정적 상호성). 전자의 경우에 문제가 생기면 아주 쉽게 그 관계가 사랑인지 스토킹인지 구분할 수 있지만 후자가 성립되지 않았을 때는 심지어 그 당사자들도 관계를 사랑이라고 인지하는 경우가 생긴다. 인정적 상호성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 어떤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검증을 하거나 판단을 내리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집중하는 건 행위의 도덕성과 윤리성이지만 사실 이 인정적 상호성에 문제가 생기면, 즉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그 행위의 도덕성과 윤리성에 문제가 발생한다.


상대방이 나를 어떤 식으로 인지하는지, 어떻게 대우하는지는 굉장히 깊은 대화를 통하거나 상대의 행위를 장기간 관찰하는 것을 통해서 알아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몇몇 연구나 이론에 따르면 두 당사자간의 물리적 거리와 행위의 윤리성과 도덕성에는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두 사람이 멀리 떨어질수록 상대에게 하는 행위가 비도덕적이거나 비윤리적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상대와 거리가 멀어지고 내가 상대의 감정을 직접 인지할 수 있는 정도가 낮아진다면 소통과 공감의 정도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되면 상대적으로 쉽게 상대방을 수단, 도구적으로 인식하게 될 수 있다는 점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최근의 사회에서 우리의 소통이라는 것은 대면보다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활용해 비대면으로 이뤄지는 경향이 있다. 방금 소개한 내용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상대방을, 혹은 상대방이 우리를 수단으로 여기기 쉬워지고 더 심해지면 비윤리적인 행위를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볼 수 있다. 연인 간에, 가족 간에 강력 범죄가 뉴스 지면에 자주 등장하고 실제 범죄율의 증가폭 역시 가팔라지고 있는 원인을 소통의 부재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 덧붙여 방금 이야기한 간접 소통의 증가가 그 원인 중 하나로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맹목성과 같이 논해봐야 하는 가치는 신념이다. 사랑에서와 같이 우리는 어떤 행위를 맹목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하고 어떤 행위는 신념적이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이를 구분 지을 때도 우리는 이성적 판단 여부를 기준으로 삼으려 하지만 신념은 큰 틀에서 맹목성의 다른 이름 같은 것이다. 신념에도 이성적 판단은 부재하거나 아주 적게 가미돼 있다. 때문에 여기서 이성을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오히려 앞서와 마찬가지로 상호성이 기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의 경우와는 다르게 여기서 상호성은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정의로운 사회란, 모든 구성원이 서로를 온전히 인정해 주는 사회다

-인정투쟁: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문법(1992, by Axel Honneth 악셀 호네트)



사실 상대방을 목적으로 대하는, 상호 존중의 태도가 확장된 것을 우리는 '공공성(Öffentlichkeit)'라고 한다. 그리고 너무 당연하게도 민주제 사회의 기초가 되는 것이 이 공공성이다. '서로 존중해야지.'라는 말은 우리도 일상에서 자주 사용한다. 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이 '존중'은 오남용 되는 측면이 있다. 치열한 토론이나 의견 개진의 상황에서 상대방의 입을 막는 용도, 구체적으로 말하면 누군가의 '틀린' 이야기도 충분히 들어줘야 하고 어떤 가치 부여를 해 줘야 한다는 희한한 논리의 근거로 이 존중이라는 가치가 활용되는 경우가 있다.


현재 한국에서 사회적 담론의 형성은 대부분 인터넷상에서 벌어진다. 문제는 온라인상에서의 소통이라는 것은 상호존중을 기반으로 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인터넷이라는 매게를 거치기 때문에 소통 당사자들 간의 거리가 매우 멀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에 대한 개인 정보가 부재한 상황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우리는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를 아주 쉽게 수단적으로 대하게 된다. 자신의 의사를 더 잘 반영시키고 논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상황에서 상대를 수단으로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아주 쉽게 내 반대에 있는 사람을 맹목적이라고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상대방을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된다.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의 결과를 보면 상호 간의 거리가 가까울 때 더 적게 비윤리적 행위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대면 소통에서 상대를 더 존중할 수 있게 될 가능성이 높고, 상대를 수단으로 대하며 맹목적 비난을 하는 상황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소통 자체가 어려운 일인 데다 지금의 현실을 반영했을 때 대면 소통은 더더욱 불편한 일이다. 그 불편함은 단순히 귀찮음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이지 않은, 트렌드에 부합하지 않는 상황을 뚫어내야 한다는 점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불편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상호성에 대한 확실한 이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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