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말은 아인슈타인이 했다고 알려진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을 하게 된 경위를 차치하고 본다면 사실 신은 늘 주사위를 던지고 있다. 우리의 인생을 보면 그렇다. 우리의 인생은 예측할 수 없으며 늘 불확실성에 놓여있다. 때문에 그것은 우연과 운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우리가 들이는 노력의 영향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운이 70% 이상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 '운칠기삼'이라는 말을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걸 보면 우리 스스로도 이 예측 불가능성을 잘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운 적인 요소가 이렇게 크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수하게 널려있는 변수들이 무작위로 인과적 연결이 되어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이런 메커니즘으로 벌어진다. 때문에 그 일이 벌어지거나 닥칠 때까지 우리는 그 인과의 연결을 모두 예상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떤 일이 발생하면 갑작스럽다고 느끼고 운 적인 요소가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추후에 생각하면 논리적 설명을 해 낼 수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무작위로 인과적 연결이 형성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할 뿐 변수 하나하나와 그것이 연결되었을 때의 인과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보면 이러한 일들 중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들을 시스템화해서 규범이나 제도로 만든다.
인간은 이 불확실성을 통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때문에 그것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유무형의 것들은 예측 가능성을 위한 목적을 지닌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이러한 통제가 부분적으로라도 이뤄졌기 때문에 지금 정도의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다. 가끔 우리는 '자연적', '본능적'이라는 가치를 절대 선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인류는 그것들과 반대되는 길을 걸어왔고 그 때문에 지금의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무수히 많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벌어진다. 불확실성의 완벽한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근본 원인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서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매우 예측 불가능하다. 그 어떤 인간도 늘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그래서 규칙적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아니 그러한 삶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육체를 지니고 있고 이 때문에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지속적으로 변하는 욕구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 욕구로 인해 우리는 의식적인 행위뿐 아니라 무의식적 행위도 하기 때문에 이를 완전히 컨트롤하기란 불가능하며 심지어 의식 속에서 벌어지는 행동 또한 욕구에 의해 비논리적, 비이성적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우리는 이 영역에서 스스로를 아주 간단하게 속여버리거나 아주 쉽게 패배해 버린다.
이렇듯 우리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근거는 매우 강력하다. 나에 대한 확신조차 우리는 가지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미래를 계획하고 그 계획대로 추진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늘 실패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늘 장려한다. 이러한 성향은 어찌 보면 완전히 불안정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기에 여기서 탈출하려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계획과 추진을 필수적이고, 동시에 아주 선한 행위로만 간주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더더욱 그러한데 이를 전 사회적 차원에서 장려하다 보니 우리의 스트레스가 심해지고 낙오자들이 속출한다.
주변에서 고민이 있다고 해 들어보면 그 세부적 내용이야 항상 다양한 양태를 지니고 있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이 불확실성 속에서 확실한 성공과 성취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그 길을 찾으며 고민하고 힘들어한다. 필자가 그러한 사람들을 보면서 늘 느끼는 것은 불확실성 속의 확실한 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니 마음을 다잡아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진행할 일을 빠르게 선택해 최선을 다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보통 어떤 일의 성패로 그 일을 위해 들인 노력과 시간을 값진 것으로 평가하기도 하고 낭비로 생각하기도 한다. 상황을 잘 모르는 남이 그러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실패의 경험이 몇 번 쌓이면 사람은 겁에 질리게 된다. 겁에 질린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안 하는 선택을 하거나, 고민을 하다 노력을 경주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를 만든다. 어느 쪽이든 열심히 하다가 실패하는 것보다 안 좋지만 성패에 지나치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가 겁쟁이가 되면 의도하지 않게 그 방향으로 흘러간다.
진짜로 운의 영역에 속하며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두려워할 부분은 어떤 일의 결과를 맞이하는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한 부분이고 그 감정이 결정하게 될 내 사유의 형태와 방향성이다. 우리에게 타임머신이라는 기술이 없고 영화에서처럼 동일한 '내'가 동일한 경험을 여러 번 할 수는 없지만 추측컨대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같은 경험 속에서 같은 감정을 겪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이 부분이야 말로 신이 주사위를 던지고 있는 예측 불가의 영역이다. 문제는 이렇게 얻어진 감정과 생각의 경험은 이후 나라는 사람을 규정해 버린다.
이 절대적 불확실성에서 벗어날 방법은 앞서 이야기한 어떤 일의 성패를 예측하는 것보다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유일하게 여기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행위는 평소의 내 생각을 올곧게 가지고 행동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나를 갈고닦는 행동을 꾸준히 해 각인을 시킬 수 있다면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 인간상에 맞는 범주의 감정을 느끼고 그러한 사람이 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평소에 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의로운 행동을 함으로써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절제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절제하는 사람이 되며, 용감한 행동을 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된다.
-니코마스의 윤리학(by 아리스토텔레스)-
우리는 미래를 걱정하며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해야 할 일을 하는데 쓸 노력을 낭비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한다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되거나 혹은 그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그 어떤 일도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경우는 없다.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는 내가 있을 뿐이다. 때문에 그 성패에 집착하기보다 그 결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되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 걱정된다면 지금 내가 하는 행동과 나의 생각을 돌아보면 된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이상향적 생각과 행동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