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에서건 이기주의는 배척받는다. 한국에서도 당연히 이기주의적 행동은 환영받지 못한다. 이기주의는 자기만 생각하는 것으로 남에게 피해를 준다고 여긴다. 반면 개인주의는 다르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며 나의 개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지나친 개인주의'라는 말을 가져와 사실상 이기주의와 등치 시키고는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이들은 한국 사회는 여전히 개인보다는 집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개인주의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두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이 한 가지 동의하는 것은 서구 사회가 개인주의 성향이 더 강하다는 점이다.
90년대 초중반까지 언론에서 이 개인주의가 다뤄지는 모습을 보면 사실상 이기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 이를 이기주의와 구분 짓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 구분의 기준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가 아닌가'였다. 그리고 민주사회를 위해 필요한 덕목인 것처럼 소개되었다. 그 배경이 되는 것은 서구사회는 우리보다 더 먼저 민주사회를 이룩했고 그 저변에 개인주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때에 정립된 개인주의의 정의와 이에 대한 인식이 지금껏 공유되고 있다.
서양은 우리의 인식처럼 개인주의적이지만 그 개인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다르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개인주의가 만들어진 흐름을 알 필요가 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큰 틀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왕정의 붕괴였다. 왕과 신은 당시의 국가를 결속시키는 절대적 가치였다. 이것이 붕괴하면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다른 가치가 필요했고, 이때 민족과 국가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동시에 개인이라는 개념도 등장했는데 그 이전에는 신, 왕, 귀족이라는 가치 외에 백성은 그저 이들을 떠받치기 위한 의미,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했지만 이 질서가 붕괴하면서 개인이라는 개념이 사회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개인이 처음으로 국가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각 나라들의 상황에 따른 다양한 흐름이 있었지만 대체로 지역 커뮤니티와 중간 집단들이 그 사이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
국가와 개인의 직접적 만남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지만 보통은 갈등의 양상을 띠었다. 지역 커뮤니티와 중간 집단은 이 상황에서 완충적 역할이나 개인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리고 개인은 그 지역 커뮤니티 구성하고 활성화시키는 존재로 상호 연대 의식을 배양하게 됐다. 그리고 민족이라는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 국가들이 1, 2차 세계대전을 위시한 끔찍한 참극을 일으키며 다시금 민주제라는 가치가 재정립되었고 그 과정에서 개인, 특히 국가가 개인을 통제나 지배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장치들에 대한 재고가 이뤄지고 개인의 위상과 가치를 높이고 보호하는 내용이 국가의 핵심 가치가 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많은 나라의 헌법에 명시가 되면서 민주제의 핵심 가치로 자리 잡았다.
정리하자면 서구권에서 개인은 지역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상호 연대의식을 지닌 존재이자 민주제를 구성하는 존재로서 국가 권력으로부터 보호받으며 사회적 다양성을 확보해 준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연대의식이다. 우리는 연대라고 이야기하면 보통 공통된 의식이나 목표를 가지고 함께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단순한 협력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연대는 서로 소속감을 가지는 것이며 함께 연결되어 책임까지 함께 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때문에 연대라는 것은 계약적 협력 이상의 상호성이 존재하고 이 '소속'을 유지하기 위한 희생과 배려, 양보라는 속성도 포함한다. 그래서 단순한 개인 간의 이익을 위한 협력을 넘어서는 공공선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윤리적 성격을 가진다.
한국에서는 앞서도 말했듯, 조금 과격하게 이야기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이뤄지는 이기주의 정도로 개인주의가 통용된다. 문제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는 누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것이냐는 거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지하철에서 손잡이 기둥에 몸을 기대고 서서 핸드폰을 보고 있다고 해보자. 이 행위는 어떤 상황에서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피해를 준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이 행위를 하는 사람이 주변 사람들과 상황에 지속적으로 신경을 쓰며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행위자가 자신의 행동이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주관적 확신을 가지고 있고 대응을 하지 않는다면 그 행위의 평가는 부정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게 된다.
위의 예시로 볼 수 있듯, 개인의 행위는 사적인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개인의 자유와 긴장 관계에 놓이며, 공적 영역에서는 공공의 가치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한국에서의 개인주의는 이 인식이 결여되면서 사실상 이기주의의 영역을 넘나들며 옳고 그름의 도덕적 판단 영역에 놓인다. 이러한 인식의 결여에는 한국의 개인주의가 형성된 과정이 가지는 특징이 있다. 바로 지역 커뮤니티나 중간 집단의 역할이 부재했다는 것이다. 근대의 태동시기에 식민지배를 받게 되면서 전체주의적 시스템이 사회적으로 내재돼 버렸고 광복 후에도 긴 시간 동안 독재가 이어졌다. 그리고 독재 시기에 지역 간 갈등이 독재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활용되면서 사실상 지역의 역할이 극도로 축소된다.
개인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각자도생의 상황에 내던져졌다. 보호받는 민주제 사회의 구성 주체가 아니라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개체가 되었다. 심지어 이러한 상황은 제도적 민주제가 정착하게 되면서 심화되었다. 그것의 도덕적 판단 여부랑 별개로 과거의 강력한 독재체제가 붕괴 후 이를 대체할 만한 인식적, 혹은 시스템적 장치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 중간에 형성된 중간 집단들 역시 강력한 국가 권력 행사 시기에는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하였고 이 체제의 붕괴 이후에는 공공선을 대변한다는 인식을 주지 못했다.
공공선의 추구와 연대가 부재한 상황에서 행위의 판단은 도덕적으로 흐르게 된다. 그것이 이기주의적이냐 아니냐의 판단만 남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논의 대상이나 주제가 판단의 영역으로 흘러가는 주요 이유다. 심지어 그 기준이 되는 도덕 기준은 대부분 보편적이지 못하고 지극히 개별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싸움은 끊이지 않고 지속된다. 어떤 세력들은 이러한 갈등적 상황을 이용하고 부추기기도 한다.
사랑은 무엇보다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은 가장 높은 형태의 역량이다.
-사랑의 기술(by 에리히 프롬 Erich Fromm, 1956)-
연대는 어떤 측면에서는 사랑과 공통점이 있다. 연대는 공공선을 위해 개인이 희생을 감수하고 협력하는 것인데 사랑 또한 상대에 대한 배려와 희생을 기반으로 한다. 이 두 개의 가치는 관계에서 공공선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최근 젊은 세대들이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기사들이 나온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언급되는 것이 보통은 젊은 층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다. 하지만 이는 연애를 단순히 비용편익의 문제로 환원하며 바라본 단편적 해결책이다. 그런 관점이 옳다면 인류는 평온하고 안정적인 상황에서만 연애를 하고 가족을 꾸렸을 것이며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규모의 사회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구성원들이 점점 사회를 구성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과 이 때문에 더더욱 이기주의로 빠져들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것(연애, 결혼, 협업, 봉사, 참여, 연대 등)을 불필요하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이러한 가치들은 소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 불리는 계산적 관점에서는 비효율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배제된다.
이기심과 이기주의적 행위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일탈로 이어진다. 그것이 연대를 파괴하고 고립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개인주의가 다시금 재정립되고 퍼져야 하는 이유다. 다행히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 사회에 이러한 움직임들이 가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를 갈등의 심화로 보거나 무의미하다고 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 또한 많다. 그럼에도 그들조차도 살기 좋은 사회를 원할 것이다. 살기 좋은 사회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상호 간의 '연결'속에서 긍정적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고립은 늘 더 큰 고통을 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