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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카게살자 Oct 13. 2023

여행의 이유

  배낭여행은 갑자기 결정한 일이었다. 중년의 나이가 넘어선 이후로 사는 것이 문뜩 이유 없이 지겹고 무의미하다고 느끼곤 했다. 그래서 그냥 여행사이트를 아무 생각 없이 검색하다가 목적지로 정한 곳이 달랏(Viet Nam, Da Lat)이었다. 겨울에도 아름다운 꽃이 핀다는 곳, 일 년 내내 한국의 가을처럼 날씨가 좋다는 곳, 베트남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곳이 달랏이라고 했다. 굳이 억지로 인연을 끼워 넣는다면 당시 근무했던 대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달랏대학교(Dalat University)가 있다는 정도였다.

  비행기 출발이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 표를 샀다. 사실 준비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동안 여러 번의 배낭여행을 떠났지만, 20년 전 처음 배낭여행을 떠날 때의 흥분과 설렘과 철저한 준비는 잊은 지 오래되었다. 여행가기 전날까지도 항상 바빴다는 것은 그저 핑계이고 솔직히 게을렀다. 이제는 여행 준비하기도 귀찮았다. 

  그리고 경험상 잔뜩 무거운 배낭을 꾸리고 낑낑거리며 메고 다니면 나중에는 짐밖에 되지 않았다. 진정한 여행자는 최대한 가볍게 그래서 눈썹마저 밀고 떠나야 한다는 어떤 여행 고수의 충고를 항상 가슴에 담아 두었다. 여권과 책 한 권, 약간의 미국달러, 신용카드, 상의 하나, 가벼운 점퍼 하나를 매일 메고 다니는 배낭에 넣고 떠났다. 

  자정이 넘어서 출발하는 저가 항공인 비엣젯(Vietjet Air)이 그렇게 악명 높은 항공사였는지를 그때는 전혀 몰랐다. 허술한 서비스, 불러도 잘 오지도 않는 불친절한 승무원들, 바가지 가격 수준의 기내 음료와 기내식 등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하기야 값싼 항공권을 구입했으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게다가 옆자리에 같이 앉아서 갔던 중년의 남녀 커플들도 범상치 않았다. 

  어쨌든 거의 다섯 시간의 비행 끝에 아침 일찍 달랏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수속을 하는데 통상적으로 묻는 입국의 이유 “여기에 무슨 일로 오셨나요?”라고 묻는 입국심사 공무원의 물음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정말 내가 여기 왜 왔지?” 잠시 동안 침묵하다가 “관광”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의례적인 질문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에 내가 들었던 생각은 조금 비약하자면 오래전 초등학생 때 선생님에게 칭찬받으려고 방과 후에 남아서 열심히 교실청소를 했는데 선생님은 칭찬은 고사하고 바닥의 구석부분은 왜 깨끗하게 닦지 않았냐며 오히려 혼이 났을 때의 민망함과 억울함을 한꺼번에 느꼈던 감정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때는 그 질문이 그렇게 느껴졌다. 택시를 타지 않고 꾸역꾸역 현지 사람들과 로컬버스를 뒤섞여 타고 허름한 호텔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하고 방안에 그냥 가만히 누웠다. 예전 같았으면 시간이 아까워 바로 나가 뭐라도 했을 텐데 말이다.

  “진짜 뭐 하러 여기 왔지?” 누워 있으면서 또 그 생각을 했다. “뭐 하러 왔기는? 그냥 온 거지!” 여행을 핑계 삼아 그냥 온 것이지, 그 외에 무슨 심오한 이유가 있겠는가? 그 이후로 여행은 매우 단조로웠다. 사람들이 여행을 가면 유명 관광지만 갔다가 인증샷만 남기는 것을 나는 싫어한다. 대신에 시장과 근처의 대학교가 있으면 꼭 방문한다. 시장은 그곳 사람들의 삶을 잠시나마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고, 대학교는 그곳 젊은이들을 만나서 그들의 생각을 얘기해보고 그들이 희망하는 미래를 듣고 싶어서였다.

  달랏을 여행하는 동안에 관광지를 가는 대신 근처의 쑤언흐엉(Xuan Huong)이라는 커다란 인공호수에 자주 갔다. 이 호수는 1919년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던 시절에 만들었다고 하는데, 둘레가 6km, 면적이 25만㎡ 되며 천천히 산책하면 두세 시간 정도 걸렸다. 바쁠 게 없으니 걷다가 예쁜 카페가 있으면 들어가서 진한 베트남 연유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는 나와서 그늘이 있는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그러다 지겨우면 시장에 갔다. 거기서 한참 동안 사람 구경을 하고 군것질을 했다. 거기나 여기나 사람 사는 곳은 똑같았다.

  하루는 달랏대학교(Dalat University)를 방문했다. 마침 방학이라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캠퍼스 여러 곳을 다리가 아플 정도로 걸어 다녔다. 캠퍼스는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마음씨 좋게 생긴 수위아저씨가 이곳저곳을 안내해주면서 사진을 찍어주셨다. 다음에 가면 밥이라고 한번 사드려야겠다. 한류의 영향인지 그 학교에도 세종학당이 있었고 한국의 다른 대학교도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달랏이라는 도시는 한국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런 조그만 낯선 도시의 대학교에도 한국이 있었다. 역시 한류는 위대하다.

  재미는 없었지만 그렇게 조용하고 평화롭게 달랏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런데 커다란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그 다음날, 전 세계를 3년 넘게 고통으로 몰아넣은 코로나가 터졌다. 아마도 하루만 늦게 귀국했다면 많은 곤욕을 치렀음이 분명했다. 그 이후로 3년이 넘는 시간을 우리는 갇혀있었다. 결국은 코로나 전 마지막 여행이 달랏이 되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코로나 전에 운 좋게 여행을 한 것 같다. 지금도 아침이면 화려하게 피어난 꽃이 가득했던 달랏이 가끔씩 생각난다.

  사람들은 왜 여행을 하는가?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Honore Marcel)은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즉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했다. 인간은 끊임없이 이동해야하는 본능을 타고났다고 한다. 이는 별로 이동하지 않는 다른 영장류인 침팬지, 고릴라 등과 다르며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사자보다 약하고 치타처럼 빠르지 못한 인간이지만 우리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지구력과 이동 능력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능력과 본능 때문에 인간은 여행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조용히 혼자 있고 싶을 때, 무언가 생각을 깊게 해야 할 때 우리는 항상 여행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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