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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헌 간호윤 Nov 15. 2021

남의 선생 노릇(1)(2)

하기야 근심조차 안 한다면야-

남의 선생 노릇(1)


“미치기 전 단계가 무엇인지 아나? 열중하는 거야”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不狂不及)』라는 책이 베스트가 되며 덤으로 화두가 된 말이, 이 ‘불광불급(不狂不及)’이다. 나도 이 말을 학생들에게 자주 쓰지만, 사실 ‘不狂不及’이란 용어는 우리 고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저 신조어(新造語) 쯤으로 여기면 된다. 


더욱이 구두점을 어디에서 떼느냐에 따라 이 말의 쓰임이 영판 달라진다.

不狂 / 不及이면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이지만, ‘不 /狂/ 不及’이면 ‘미친개가 이르지 아니함이 없다’이다. 미친개가 오면 될 일도 안 된다. 그저 걸음아 나 살려라, 줄행랑을 놓는 수밖에.


해석도 구두를 어디서 떼느냐에 따라 저렇듯 다르다.

미치지는 말아야 한다. 공부에 ‘열중하는 것’과 ‘미치는 것’은 사는 동네가 다르다. 아-, ‘ㅁ’에서 ‘ㅇ’을 가자면 ‘ㅂ’과 ‘ㅅ’을 거치니, 거리가 좀 먼가.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보니 이런 소리를 자주 듣는다.

“○○○교수는 학생들을 무시해. 그래도 어쩌지 못하는 것은 실력이 끝내주거든…”

‘1류 선생’의 조건은 무엇일까?

『순자』14, <치사편>에 이런 구절이 보인다.


남의 스승이 될 만한 네 가지 길이 있으나 ‘널리 배움[博習]’은 들어가지 않는다.

(첫째) 존엄성이 있으면서도 행동을 꺼릴 줄 안다면[尊嚴而憚] 선생이 될 만하고,

(둘째) 나이가 들어서도 남들에게 믿음성을 준다면[耆艾而信] 선생이 될 만하고,

(셋째) 글을 외면서 남을 업신여기거나 죄를 범하지 않는다면[誦說而不陵不犯] 선생이 될 만하고,

(넷째) 자질구레한 것임을 알면서도 사리를 밝히려 따지고 든다면[知微而論] 선생이 될 만하다.

그래 ‘남의 스승이 될 만한 네 가지[師術有四]’에 ‘널리 배움(박학)’은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師術有四, 而博習不與焉. 尊嚴而憚可以為師, 耆艾而信可以為師, 誦說而不陵不犯可以為師, 知微而論可以為師. 故師術有四而博習不與焉.


남의 선생 노릇(2)

우리가 잘 아는 ‘온고지신(溫故知新)’ 또한 선생과 관련된 용어이다. ‘온고지신’, ‘옛 것을 알면서 새 것도 안다’는 뜻이다. 본래 이 말은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공자의 말 중에 “옛 것을 알고 새 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可以爲師矣).”라는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옛 것을 배운다 함은 옛 것이나 새 것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아야, 즉 전통적인 것이나 새로운 것을 고루 알아야 스승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선조실록』 선조 즉위년(1567년) 11월 16일에 보이는 고본 기대승 선생은 이 ‘온고지신’을 저렇게 풀이한다.


“무릇 책을 건성으로 읽어서는 상세하게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한 번 두 번 백 번에 이른 연후에 자세히 깨달을 수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안다’라는 것입니다.

(凡書乍讀, 則不能詳曉 一度二度, 至於百度, 然後可詳曉也 此所謂溫故而知新也)


선생이란,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알아 제자에게 그 깨달음을 주는 자라는 뜻이다. ‘산의 나무는 그려도 바람은 그릴 수 없고, 님의 얼굴은 그려도 마음은 그릴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선생이기에 ‘바람’과 ‘마음’을 어떻게든 배우는 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허나, 어디 쉽게 ‘바람’과 ‘마음’이 보이던가. 그러니 선생이라 불리는 자들, 저 행간 속을 관류하는 저의를 독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보시오. 선생님네, 오늘도 정약용 선생처럼 복숭아뼈가 세 번이나 뚫어지도록 앉아 책을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는 의미 아닐까요.


그러나 저렇게 공부하여도, 모든 선생 된 자는 하나같이 제자에게 학문적으로 죽게 되는 것은 정한 이치이다. 선생 된 자들은 그래 제자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워야 한다. 오죽하면 공자님도 뒤에 난 사람이 두렵다고, ‘후생가외(後生可畏)’란 말을 했겠는가.


이러한 생각들로 1류 선생을 당겨본다. 자칭 1류 선생이라 여기는 분들, ‘1류’니, ‘선생’이니 하는 해석을 잘해야 한다. 저 조건에 내가 부합하는지를. 


두어 문장만 췌언으로 놓는다. 인류의 스승이라 부를 수 있는 공자의 말씀으로 『논어』에 보인다.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 


해석조차 필요 없다.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는 뜻 안닌가. ‘세 사람이 가다 보면 좋은 놈, 나쁜 놈이 있을 터이니, 좋은 놈은 본받고 나쁜 놈은 경계한다면 모두 스승이 아니냐’라는 말씀이다. 그래 선생이라는 불리는 이들은 모든 이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모두 가르침을 주니 말이다. 허나 저런 선생 찾기가 아마 하늘에 있는 별 따기이리라.


한 마디만 더. 『맹자』 ‘이루상편’에는 또 이런 경계의 글이 있다.


사람들의 근심은 남의 선생 노릇을 좋아하는 데 있다.(人之患在好爲人師)”


하기야 근심조차 안 한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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