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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헌 간호윤 Nov 17. 2021

‘한 겨울, 이 새벽녘에 집 사람이 어디로 갔지.’

거실의 시계는 새벽 4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술에 관한 수업 준비를 하다 20년도 훨씬 지난 글(사건은 이로부터 10년 전쯤이니 30년 전 일이다.)을 보고 고소를 금치 못한다. 아마 저 시절에 내가 그랬었나 보다.



지금은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내 나이 또래는 ‘국문과’를 ‘술문과’라고 불렀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전공도 국문학에 그것도 고전문학, 여기에 집안 내력까지 더해, 꽤 술을 좋아하는 터다. 그래 저 소년(이동악이 술로 인하여 장가든 일)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술에 관한 별난 비사를 여남은 갖고 있다. 그중 한 일을 이 자리에서 고백하련다. 


어느 때 겨울방학 무렵, 모의고사 문제로 모인 모임이 있었다. 수고했다며 그쪽에서 한 턱 내는 데다 채점수당도 받았고 하여 얼얼하게 술에 취했다. 당시엔 지금처럼 대리운전이 정착되지 못한 때였다. 더욱이 날씨가 너무 춥고 또 집도 멀지 않은 터라, 그냥 차를 끌고 나섰다. 시동을 걸었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11:00’라는 숫자가 깜빡거렸고, 잠시 후 ‘내일 눈이 오겠으니…’라는 달콤한 목소리가 흘렀다. 


갈증이 나고 몹시 추워 눈을 떴다. 휘 둘러보니 우리 집 거실이었다. 찬 거실에 옷을 입은 채로 내가 옹송그리고 누워 있었다. 그래 ‘이 사람이, 술에 취해 들어왔다고 이 겨울에 여기다 내 팽개쳐!’하며 안방 문을 열었다. 불은 켜져 있는데 집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애들 방에도 없었다. 아이들을 깨워 물어봐도 엄마가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 한다. 


거실의 시계는 새벽 4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한 겨울, 이 새벽녘에 집 사람이 어디로 갔지.’ 

목에 매달린 넥타이를 잡아 뺐다. 주머니를 뒤졌다. 온전했다. 수첩을 꺼내보았다. 어제 받은 봉투가 없다. 몹시 갈증이 났다. 냉수를 들이켜고는 어제 일을 더듬었다. 


집의 중간쯤 왔을까. 

횡단보도에 서있는데, 난데없이 트럭 한 대가 내 차 옆으로 바짝 다가와서는 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 창문을 내렸더니, 내 나이쯤 돼 보이는 사내였다. 그 사내는 술기운에 이미 초점이 흐려진 내 눈에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길옆에 차를 좀 대어 달란다. 사내의 사연은 꽤 슬펐다. 기억의 퍼즐을 맞추자면, 그 사내는 지방에서 서울로 생선을 싣고 다니는 장사치인데, 서울에선 물건을 받아줄 곳이 없어지고, 그래 빈손으로 내려가자니 기름값도 없고 하여 트렁크에 있는 생선을 좀 사달랬다. 


지금도 그렇지만 난 본래 귀가 얇다. 학교에 들어오는 물건은, 망원경, 스쿠알렌, 음악테이프, 인삼세트, 도장, 더덕, … 따위를 죄다 사들여 집에서 잔소리깨나 듣는 편이다.(참고로 학교에 들어오는 행상의 물건치고 제대로 된 것은 거의 보지 못하였다.) 맨 정신에도 이러하니, 술 한잔한데다, 난감한 사내의 모습이라. 채점수당으로 받았던 근 20여만 원이 넘는 돈은 사내의 주머니로, 대신 내 차엔 서너 상자의 생선 박스가 실렸다.   

간신히 집으로 들어와 넥타이를 풀며 걱정하던 집사람에게 키를 건네주었다. 차에 생선이 있는데 내가 술에 취해 들고 오지 못했다고, 그대로 두면 얼 것 같으니…. 그리고 집 사람이 나간 뒤 언제나 하던 대로 문을…, 



현관문이 꼭 잠겨 있었다.     

이키나! 베란다 문을 열고 나섰다. 아파트 안인데도 한 겨울의 냉기에 진저리가 쳐졌다.

8층을 한달음에 내려가 ‘왈칵’ 아파트 정문을 밀쳤다. 눈발이 먼저 내 얼굴을 스치고 하얀 눈 세계가 펼쳐졌다. 4년을 산 포도마을 809동 아파트 앞이 그렇게 낯설고 넓은 곳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 동과 마주하고 있는 810동 아파트 벽, 두 줄기 자동차 불빛에 하얀 눈이 나비처럼 날았다.   

‘엑셀, 경기 37두 7801.’ 그 차 안에서 집 사람이 엷은 겉옷 바람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난 그 뒤부터 누가 다가와도 절대 차의 창문을 안 내린다.(그 당시 20만원이면 내 교사 월급의 반은 되었다. 생선은 상해있어서 모두 버렸다.)


여하간 ‘술은 백약의 장(長)’이라고도 했다. 

술은 알맞게 마시면 어떤 약보다도 몸에 가장 좋다 하니 적당히만 마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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