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점 유감>

서로 얼굴을 보았다면-

by 휴헌 간호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기말고사 채점을 하여 학점을 낼 때면 신경이 곤두선다. 제 아무리 객관적으로 평가를 한다 하여도 늘 마음이 편치 못하다. 자연 학생들이 제출한 글을 몇 번씩 되읽기도 한다. 그런데, 눈을 씻고 다시 보았다. 틀림없는 내 글이기 때문이다. 학생은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아래 글을 답안지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우리나라의 독서율이 이러한 발자국 따라가기 아닌가 하여 몇 자 덧놓는다. 중고등학생은 그렇다 해도 초등학생, 특히 유아기의 독서 열풍은 아주 바람직하지 못하다. 유아기의 과잉 독서는 책의 의미를 몰라 기계적으로 문자만 암기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하이퍼렉시아라 하는데, 끝내는 유사자폐로 이어진다는 것이 의학계의 진단이다.


소설 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는 “그는 지나치게 책 읽는 일에만 빠져들어 무수한 밤을 책 읽느라 지새웠고,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책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잠자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책 읽는 시간은 많아져서 머릿속은 텅 비고 마침내 이성을 읽어버렸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아무런 의심 없이 책이 챙겨주는 정답을 외우는 돈키호테의 독서행위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에게 읽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자기의 주견을 굳건히 다진 뒤에야 내 뜻으로 책을 읽는다. 에디슨이 1,093개의 특허를 따고, 세계 인구 0.2%의 유태인이 노벨상 수상자의 22%를 배출했으며, 시카고대학이 인문고전 100권을 읽게 하여 노벨상 왕국이 되었다는 등, 지식 나부랭이나 몇 추스르거나 울레줄레 남들 따라 시험이나 영달을 위해 줄이나 긋고자 책을 잡는 독서로는 결코 사마천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연암의 꾸지람도 피하지 못한다. 글을 읽는 이라면 마땅히 자기의 주견을 굳건히 한 뒤에 내 뜻으로 읽어야 한다. ----


내 블로그의 글을 누군가 인터넷 상에 올려놓았고 이 글을 저 학생이 <글쓰기와 토론> 기말시험으로 제출한 것이다. 앞과 뒤에 서 너 줄만 학생 글이었다.(다른 제출 과제도 모두 C였다.)


지금까지 선생 노릇을 30년 넘게 했다. 자기 교수의 글을 글쓰기 과제로 제출했다는 이야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다. 코로나 19로 재택강의를 했지만 나름 열심히 강좌를 촬영하여 올렸다. 여러 차례 정직한 글쓰기가 바른 글쓰기라는 점도 강조하였다. 명색이 대학생으로서 상식을 벗어난 행동이기에 전화를 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당연히 나는 꾸지람을 심하게 할 것이고 학생으로서는 참 난감한 처지일 것이기에. F학점을 주면 알 것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생각이었다. 저 학생은 F학점 받은 이유를 모르겠다고 당당히 성적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나는 도리 없이 F인 이유를 꾸지람 섞어 말해주었다. 글쓰기 강의에서 선생과 제자로 한 학기를 만났건마는 이쯤 되면 선생도 선생이 아니고 제자도 제자가 아니다. 지나가는 행인도 아닌, 인연으로 만난 ‘사제 간’이란 말이 참 무색하다.


생각해보니 이 또한 코로나 19로 일어난 일인 듯하다. 이번 학기 한 번도 학생들을 보지 못하고 마쳤다. 서로 얼굴을 보았다면 이런 과제를 제출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 19로 세상이 뒤숭숭하고 내 마음도 산란하다. 코로나 19로 내 주변에도 여러 일들이 일어났다. 대부분 좋은 일보다는 가슴 아픈 일들이다. 이런 일이 있고 보니 '코로나 19'라는 놈이 더 괘씸하고 흉물스럽다.


이유가 여하하든 채점 유감이 꽤 오래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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