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오.>

세월 가고 오듯 인생도 흐르는 것을

by 휴헌 간호윤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오.>


아침마다 내 서재 휴휴헌으로 온다. 매미소리가 가뭇없이 여름을 데리고 사라졌다. 반팔 속으로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슬몃 소름이 돋는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도심인데도 오늘따라 이른 아침부터 “꾸구궁” 울어대는 뻐꾸기 소리가 깊게 들린다. 갑자기 만해 선생의 시가 생각난다. <춘주春晝>라는 연시조인데, 풀이하면 ‘봄날의 낮’ 정도의 의미이다.


따스한 볕 등에 지고 유마경 읽노라니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린다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오.


그림 같은 봄날, 선생은 봄볕을 등에 지고 불교의 경전인 『유마경』을 읽는다. 어디선가 팔랑, 봄꽃이 날아와 『유마경』 글자 위에 앉는다. 선생은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을 필요 없다고 한다. 어찌 『유마경』 속에 진리가 있겠느냐는 깨달음이다.


선가(仙家)에서는 부처의 말을 깨닫고 보면, 경전은 휴지조각 같은 무용지물이라 한다. 갑자기 휴휴헌을 채운 책들이 우습게 보인다. 수많은 책들이 이 좁은 마음조차 잡지 못하기에 말이다. 깨닫고 못 깨닫고는 저 책 속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 오늘, 봄이 간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세월 가고 오듯 인생도 흐르는 것을,


"구태여 꽃 밑 글자에 얽혀 무삼하리오."







이전 07화나는 왜 쓰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