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연암이 좋다>

<열녀함양박씨전 병서>는 더욱 좋다

by 휴헌 간호윤

<그래 나는 연암이 좋다>


연암이 좋다.

그 약관 때부터 매서운 지조를 지녀 좋고, 가슴에 찰랑이는 바른 마음결과 자잘한 예법에 구애받지 않는 호협성이 좋다. 꿈에서 서까래만한 붓대 다섯을 얻었는데 붓대롱에 ‘붓으로 오악을 누르리라’는 글귀가 써 있어 좋고, 나이 들어 병풍에 낡은 관습이나 폐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당장의 편안함만을 취한다는 ‘인순고식(因循姑息)’과 잘못된 일을 임시변통으로 이리저리 구차스럽게 꾸며 맞춘다는 ‘구차미봉(苟且彌縫)’을 써놓고 ‘천하의 모든 일이 이 여덟 자 글자에서 잘못되었다’는 말씀이 좋고, ‘개는 주인을 따르는 동물이다. 그렇지만 기르면 잡아먹지 않을 수 없으니 처음부터 기르지 않느니만 못하다’라는 말씀이 좋다.


‘연암체’로 비변문체[문체반정]을 일으켜 좋고, 갑신정변을 일으켜 좋고(연암의 손자 박규수가 김옥균, 박영효 등에게 ≪연암집≫ 을 강독했다. 훗날 박영효가 이광수에게 '≪연암집≫에서 양반들을 혼내는 것을 보고 갑신정변을 계획했다'고 말했다), 위선적인 무리와 소인배, 썩은 선비들을 나무라 좋고, 한골 나가는 양반이면서도 가난 내림하며 청빈한 생활이 좋고, 자신을 겸손히 삼류라 한 손(을) 접혀 좋다.


벗이 적어 좋고, 나라 안의 명산을 두루 다녀 호연지기를 키워 좋고, 홍국영에 쫓기어 연암협으로 몸을 숨겨 좋고, ‘연암’이란 호가 좋고, 연암협에서 목축을 구상한 것이 좋고, 양금(洋琴)을 세상에 알려 좋고, 안의 사또 시절 관아의 낡은 창고를 헐어버리고 중국 제도를 모방하여 벽돌을 구워 백척오동각·하풍죽로당·연상각 등의 정자와 누각을 올려 좋다.


첫 작품으로 <이충무공전>을 지어 좋고 금강산을 유람하고 지은 <총석정일출>이란 시가 좋고, 이서구가 지은 ≪녹천관집≫에 써준 <녹천관집서>와 박제가의 ≪북학의≫에 붙인 <북학의서>가 좋고, 처남 이재성이 과거 우수답안을 묶은 ≪소단적치≫에 여며 둔 <소단적치인>이 좋고, 농업 장려를 위한 ≪과농소초≫가 좋고 연행록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열하일기≫가 좋다.


초시의 초장과 종장에 모두 장원과, 회시에 응시해 답안을 내고 오지 않아 좋고, 중년에 한무릎 착실히 공부한 과거를 단념해 좋고, 자식들에게 ‘구차하게 벼슬길에 오르지 마라.’는 가르침이 좋고, 안의현감·면천군수·양양부사 벼슬살이가 좋고, 안의현감 시절 저들도 손님이라며 구휼먹이는 백성들과 똑같은 밥상을 받아 좋고, 관리로서 궁속과 중의 무리를 제어하지 못하자 병을 칭하여 사직해 좋고, “안타깝도다! 벼슬살이 10여 년에 좋은 책 한 권을 잃어버리고 말았구나”라는 탄식이 좋다.


한계성을 지닌 선비로서 제 스스로 몸을 낮출 줄 아는 인간이기에 좋고, 억지밖에 없는 세상에 칼 같은 비유를 든 뼈진 말도 좋고, 스스로 삶 법을 빠듯하게 꾸리는 정갈한 삶의 긴장이 좋고, 연암의 붓끝에 완전한 사람이 없는 직필(直筆)도 좋고, 남루한 삶까지 끌어안으려는 순수성이 좋고, 조국 조선을 사랑해 좋고, 그의 삶과 작품이 각 따로가 아니라는 점이 좋고, 소설을 몸으로 삼아 갈피갈피 낮은 백성들의 삶을 그려내 좋다.


아버지를 위해 손가락을 베어 약주발에 떨어뜨린 효심이 좋고, 형과 형수에 대한 정이 좋고, 큰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누이의 눈썹이 새벽달 같다”라는 글귀로 심금을 울리는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이 좋고, 아내를 생각하여 홀아비로 생을 마쳐 좋고, 고추장을 손수 담가 자식에게 보내는 잔잔한 정이 좋고, 며느리의 해산바라지까지 걱정하는 시아버지의 마음이 좋고, 장인을 늘 칭송하는 공경이 좋고, 처남을 아껴 좋고, 청지기 김오복이를 정으로 대해 좋다.


하룻저녁 오십여 잔 술을 자시고도 주정 없어 좋고, 첫 벼슬에 받은 녹봉으로 친구에게 빚 갚을 줄 아는 마음이 좋고, 홍대용이 세상을 뜬 뒤 마음 아파 음악을 끊어 좋고, 스스로 말과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여 좋고, 우언으로 세상을 꾸짖어 좋고, 우스갯소리로 세상을 조롱해 좋고, 제갈량·한기·왕양명의 위인전을 지으려 해 좋고 조헌·유형원을 존경해 좋고, 김창협과 김창흡을 마음으로 따라 좋고, 마지막 유언이 “깨끗이 목욕시켜다오”가 좋다.


마음을 도스르고 먹을 갈아 역설·반어·속담·예증·우언 등의 수사를 두루 써 좋고, 변증적 사물인식이 좋고, 사물에 대한 치밀한 관찰로 사실을 기술하고 대상을 세밀화한 묘사한 솜씨가 좋고, 수평적 질서의 가치관이 좋고, 다치적 사고와 언어 인식이 좋고, 실증적 사고와 열린 사고가 좋고, 당대 의고주의(擬古主義) 문풍에 반기를 들어 좋고, 진정한 ‘진’을 얻으려 경험론적 요소와 관념론적 요소의 통합을 꾀해 좋고, 법고와 창신을 통한 변증적 글쓰기가 좋고, “작자가 글을 쓸 때는 전쟁에 임하는 마음으로 써야 한다”는 전략적인 글쓰기가 좋고, “현달해도 선비의 도리를 떠나지 않고 곤궁해도 선비의 도리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다짐장이 좋다.

인간들의 아첨하는 태도를 꾸짖는 <마장전>이 좋고, 똥을 쳐서 밥을 먹는 천한 역부에게 ‘선생’이라 부른 <예덕선생전>이 좋고, 놀고먹는 양반들을 ‘황충’이라 부른 <민옹전>이 좋고, 진정한 양반을 따진 <양반전>이 좋고, 유희 속에 몸을 숨긴 <김신선전>이 좋고, 얼굴이 추한 걸인 이야기인 <광문자전>이 좋고, 역관의 슬픔을 그린 <우상전>이 좋고, 학문을 팔아먹는 큰 도둑놈 이야기 <역학대도전>이 좋고, 배우지 못했어도 부부간 예절을 지킬 줄 아는 <봉산학자전>이 좋고, 배웠다는 위선자에게 범이 일침을 놓는 <호질>이 좋고, 문장이 몹시 비분강개한 <허생>이 좋고, “남녀의 정욕은 똑같다”고 외친 <열녀함양박씨전 병서>는 더욱 좋다.

그래 나는 이런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 선생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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