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시절, 내 장래 희망은 소박하면서도 무모했다. '아이 다섯 낳기.' 아기를 무척 좋아했고, 무지에서 나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 북적거림이 내 미래의 당연한 풍경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은 그 풍경을 지우개로 조금씩 지워가는 일과 같았다. 대학에 가고, 진로를 고민하고, 수험 생활을 거쳐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는 동안, '연애', '결혼', '출산'이나 '육아' 같은 단어는 내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아주 머나먼 곳으로 사라졌다.
아이가 싫어진 건 아니었다. 그저 삶을 버티느라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을 뿐이다. 내일을 꿈꾸기보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게 목표였던 시간들. 나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운 세상에서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건,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난데없이, 갑자기 "함께 살자"고 진지하게 손을 내미는 사람을 만났다. 신기하게도 그제야 잊고 있던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함께 꾸리는 가정,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아이. 한 번 싹튼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친한 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새삼 아름다워 보이고, 동료의 임신 소식에 묘한 부러움이 일렁였다.
하지만 설렘은 곧이어 서늘한 현실의 질문들을 데려왔다. "지금의 커리어를 지키면서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엄마가 되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는 걸까." "이도 저도 아닌 채로, 결국 둘 다 무너지는 건 아닐까."
퇴근길, 현관문을 열 때마다 나는 이 질문들에 대한 뼈아픈 힌트를 얻곤 한다. 하루 종일 혼자 집을 지킨 고양이가 나를 반기며 달려 나올 때.
야근에 지쳐 늦게 들어온 날, 다리에 몸을 비비며 반가움을 표하는 고양이를 보며 내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은 "다녀왔어"가 아닌 "미안해"다. 말 못 하는 고양이에게도 이렇게 죄책감을 느끼는데, 엄마의 표정을 읽고 감정을 말하는 아이라면 어떨까. 매일 아침 바짓가랑이를 잡는 아이를 떼어놓고 출근할 수 있을까. 퇴근 후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며 또다시 "미안해"라는 말을 삼켜야 할까. 내가 정말 두려운 건 육아의 고단함보다는, 사랑하는 존재에게 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핍이다. 물론 실제 육아의 고단함을 몸소 체험하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세상은 때로 우리 세대를 향해 "요즘 사람들은 이기적이라 애를 안 낳으려 해"라고 말한다. 편하게 살고 싶어서 책임을 회피한다고 혀를 차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반문하고 싶다. 오히려 그 소중한 생명을 제대로,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고 책임지고 싶기에, 내 삶의 기반이 여전히 위태롭다고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
참 독립적인 우리 고양이에게도 매일 미안해하는 내가, 과연 한 사람의 우주를 책임질 수 있을까? 그 무게를 견딜 수 있을까?
"누군가를 책임질 만큼 내 오늘은 안전한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여전히 망설인다. 고민하고, 상상하고, 두려워하는 내 마음을 끊임없이 들여다본다. 두려움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잘 사랑하고 싶어서 생기는 마음이라는 걸 알기에. 그 사실에 기대어 나는 다시 꿈을 꿔보려 한다. 서툴고 겁 많은 덜 자란 어른이지만, 지금부터 천천히 엄마가 되는 연습을 시작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