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로이 자오, 매기 오패럴
_ 영화 <햄넷>과 책 <햄닛>을 보고 나서의 감상문
(*이야기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
햄넷(HAMNET, 2026)은 올해 상반기 가장 기대하는 영화 중 하나였다. 며칠 전 날씨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중충하던 날, 이 영화를 보기엔 이날이 딱일 것 같았다. 마침 늦은 저녁 시간 아카데미 프리미어로 상영하는 영화관이 있어서 보고 왔고, 걷기엔 꽤 많이 멀었지만-사실 평소에 많이 걷는 나에겐 적당히 먼 거리였지만 그 날씨 그 시간엔 좀 무서운 동네라..- 그래도 보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유 있는(..) 우울감을 이 이야기의 슬픔이라는 정서로 씻어낼 수 있어서.
아그네스(제시 버클리가 연기한.)도 그럴 수 있었을까.
영화의 마지막, 연극 관람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는 계속 이 질문을 생각하게 되서인 것 같다.
아그네스는 죽은 아들의 이름이 연극 홍보물에 떡하니 쓰여있는걸, 그리고 배우들이 아들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대 위에서 대사로 말하는 걸 보며 분노한다. 이 희곡을 쓴 자신의 남편인, 아들이 떠나갈 때 같이 있어주지도 못했으며 심지어 바로 런던의 자신의 극단으로 다시 떠나간 윌리엄에게. 죽음이 주디스에서 햄넷으로 방향을 틀어, 집 안의 여자들을 슬픔과 분노와 무기력함으로 뒤흔들어 놓을 때도, 그리고 그 후에도 함께 없었던 남편에게. 감히 이 이름을 희곡에 쓴다고?
그런데, 연극이 시작되고 조금 지나, 햄넷이 살아있다면 아마도 저렇게 자랐을 모습을 한 배우가 왕세자 햄릿으로 등장하면서 아그네스의 눈빛이 바뀐다. 그리고, 죽음을 놓고 햄넷이 주디스와 자리를 바꿨듯, 윌리엄도 이 연극에서, 비록 연극이지만 그래도, 죽음을 놓고 자신의 아들과 자리를 바꿨음을 본다. 그리고 햄릿이 극 내내 온갖 내면의 갈등으로 괴로워하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하지만 그래도 어떠한 확신을 가지고 죽는 그에게 아그에스는 손을 내민다.
가장 다시 보고 싶은 장면이 이 시퀀스이다. 아그네스가 극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엔딩까지. 도대체 어떤 연극일까 하는 분노 섞인 궁금증으로 극장에 들어선 아그네스의 눈은 극장 안의 사람들-자신이 있는 층에 있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들과 소란함부터 저 위층에 자리 잡은 사람들의 사뭇 다른 공기까지-과 정면의 무대와 주위를 훑는데, 그 불안한 눈에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사람이 느끼는 어떤 놀라움과 흥미로움이 반짝 떠오르는 듯했다.
나는 제시 버클리를 볼 때마다 작품 안에서 본능대로 말하고 움직이는 듯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런 역할로 나오는 작품을 주로 봤던가? 그건 모르겠는데, 역할로서 말고도 배우로서, 전혀 계산되지 않고 마치 그 인물의 생각뿐만 아니라 무의식까지도 다 표현할 수 있다는 듯 말하고 움직이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인가, 이번 햄넷에서의 아그네스는 완전히 -완전히라는 단어가 너무나 잘 어울릴 정도로- 제시 버클리 그 자체였고, 제시 버클리는 아그네스 그 자체였다. 오프닝부터 이 엔딩씬까지, 다.
그리고 아이들도. 특히 햄넷과 햄릿.
엔딩 크레딧을 보는데 ‘그리고 노아 주프’이길래 왜 ’그리고‘가 붙었을까 생각하다가, 햄넷을 연기한 배우가 그의 동생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 보고 나서 찾아보니 정말이었고. 노아 주프는 영화 <원더>에서 너무 귀엽고 착한 친구 역할로 나오는데, 연기를 너무 잘해서 앞으로 계속 많이 보고 싶은 배우 중 하나였다. 그런데 동생도 연기를 이렇게 잘한다니. 아그네스는 물론이고 햄넷과 햄릿 캐스팅도 완벽하다. 이 두 형제가 햄넷과 햄릿 역할인 게 마음을 왠지 더 찡하게 만든다.
*
다시 연극 관람 시퀀스로 돌아와서,
영화는 내용을 많이 바꾸지 않은, 원작(햄닛, 매기 오패럴 작)을 충실히 옮긴 작품이다. 그럼에도 당연히 영화로 각색할 때 달라지는 부분들이 있다. 그래서 오히려 아예 많이 각색되지 않은 영화와 원작을 비교할 때(자연스럽게 읽으며 또는 보며 비교가 되기 마련이다) 살짝 달라진 부분을 왜 바꿨을까, 왜 없앴을까 왜 더했을까 나름대로 말이 되는 이유를 생각하는 게 꽤 재미있다. 이 작품은 영화를 먼저 보고 영화가 너무 좋아서 원작을 읽었는데, 이 엔딩씬이 기장 기억에 남아서인지 몰라도 읽을 때 (영화에도 있던 부분들 중에서는) 이 장면이 재미있었다.
특히, 영화에서는 아그네스가 동생 바살러뮤와 같이 연극을 보러 들어가는데, 원작에서 동생 바살러뮤는 런던에 같이 가주지만 아그네스 혼자 연극을 보는 것으로 나온다. 아마 클로이 자오는 아그네스가 주위 사람들과 무대 위의 배우들은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마도 연극을 처음 보는 사람의 반응과 원작에서는 생각으로만 하는 말들을 우리 관객에게 들려주는 것을 택했고, 그걸 바살러뮤에게 말하는 게 자연스러울 테니 영화에서는 둘이 같이 연극을 보러 들어간 것으로 했겠지 싶다. 그래서 더 극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런 걸 나름대로 생각하는 게 원작과 각색본을 읽고 보는 것의 재미인 것 같다.
아, 참고로 난, 영화에서 바살러뮤가 그 아름다운 장면을 같이 채워주는 것도 좋았다. 항상 아그네스 편인 동생이니까.
엔딩뿐만 아니라 영화의 모든 씬이 뭐랄까 거대하게 느껴진다. 이 이야기가 스크린에 제대로 담겨서일 테고, 그 이야기가 삶과 탄생과 죽음과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제와 사랑과 예술을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게 인생인데.
그리고, 그 이야기 안에서 자연이 거의 모든 씬에 등장한다는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아그네스가 어머니와도 같은 땅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부터, 영화는 이 영화가 거대하게 느껴져서 마음이 찡해지는 무언가를 이야기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 특히 죽음을 보여주는 부분들에서. 같이 울 수밖에 없는 장면들.
그래서, 아그네스는 아픔을 씻어낼 수 있었을까, 이 연극으로? 아들에게 이제서야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었을까. 이야기, 예술이라는 게 정말 그런 힘이 있는 걸까, 실제로도?
사실 나는 항상 이걸 생각할 때마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게 내가 이 영화를 기대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당장 이 영화를 보며 아그네스와 같이 울고 함께 눈을 반짝이며 연극을 보고, 그리고 그 이후에 원작을 찾아 읽으며 텍스트로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감동과 의외의 흥미로움을 찾으며 이런 경험이 그냥 버려지는 경험은 아님을 또 또 느끼니까.
그리고 또 솔직하게는, 어쩌면 아그네스처럼 맞서고 직접 느끼는 걸 주저하지 않는 사람은 못되서, 윌리엄처럼 이야기로라도 해보려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회피가 결국엔 맞서는 것으로 반전되는 걸 목표로 하면서.
*
… 그래서 결론은,
제시 버클리 그대는 상을 휩쓸어야 마땅합니다. 벌써 그랬어야 했지만요. 그리고 그렇지 못한다면 할 수 없지만, 일단 나에겐 올해의 (아직 2월이긴 한데) 베스트 액터입니다.
클로이 자오 그대 역시 앞으로 계속 영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상도 더더 받으십시오. 그렇게 될걸요?
음악 막스 리히터 역시 말할 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