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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가든 Mar 07. 2024

어떤 관계의 모양 <패스트 라이브즈>

불확실하고 특별하지만 보편적인

_ 기다리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 2023)를 보고 나서 하게 된 생각들을 이야기해 봅니다. 오늘 보고왔지만 한 번 더 보고 싶네요. 날이 풀리고 있는 요즘의 낮과 참 잘 어울리는 영화입니다.



* 영화의 세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영’과 ‘해성’은 어릴 적 초등학교 친구이다. 하교를 같이 하던, 성적을 놓고 경쟁을 하곤 했던, 누군가 울면 달래주곤 하던 친한 친구. 그들은 나영이 더 이상적인 미래를 위해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며 갑자기 헤어지게 된다.


남겨진 해성과 떠난 나영. 그들은 12년 후 성인이 되었고, 해성이 나영에게 ‘친구를 찾는다’며 남긴 SNS 메시지로 시작해서, 노트북 영상 통화를 통해 재회한다. 스크린 속의 서로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와, 너다.” “알아보겠다.”

비록 해성은 여전히 한국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여전히 해성이라고 불리는 반면, 나영은 당연하게도 한국말이 약간 어색해지고 이제 ‘노라’라고 불리긴 하지만, 서로가 기억하는 서로의 모습에는 둘 사이의 거리가 없어 보인다.


그들은 그렇게 다시 어릴 적 친구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대화한다. 단지 친구와의 대화일 뿐이지만, 미국에서 글을 쓰며 잘 살아가보고자 노력하며 살고 있는 노라에게는 꽤 무거운 감정이 찾아온다. 아마도 그건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까지 살았던 한국, 그 한국에 있는 친구 해성. 결국 노라는 해성에게 다시 한번 헤어짐의 인사를 한다.


또 12년 후. 노라는 여전히 글을 쓰며, 남편 ‘아서’와 함께 미국에서 살고 있다. 해성은 여전히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며,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라는 해성이 미국에 잠깐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렇게 이번에는 그 어릴 적 초등학생 때는 물론이고, 12년 전에 영상 통화하던 그 스크린 속 20대 때보다도 성숙해진 모습으로 또 한 번 재회한다.



*


사람 사는 이야기가 꽤 비슷하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아니, 내가 그럴 때를 일일이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다면 아마도 꽤 많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 빠르게 생각해 보면 새로운 동네를 갔을 때, 그리고 카페 같은 곳에서 사람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 이 영화를 보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 책 등 어떤 이야기가 결국 우리가 사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 다양한 이야기들이 각자 다른 특별함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떤 이야기에서 ‘사람 사는 것’, ‘관계’, ‘인연’에 대해 이렇게 정성스레 곱씹어 본 건 또 오랜만인 것 같다.


이 영화는 픽션에서든 현실에서든 흔히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굉장히 특별한 관계인 ‘인연’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또 다른 특별함은, 아무래도 노라가 미국으로 이민 온 한국인이라는 것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도 한국에서만 쭉 살아온 내가, 노라와 해성의 이 이야기에서 뭔가 특별함을 느낌과 동시에 사람 사는 이야기가 비슷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생각건대 그 이유는 아마도, 뭔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들의 관계가 우리 생각보다 매우 보편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중심에는 불확실성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람 사이에 어떤 알 수 없는 불확실한 감정이 존재하는 관계도 있다고, 그리고 그 관계가 은근히 보편적인 관계라고, 나는 이 영화를 보며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또 노라가 줄곧 말하는 ‘인연’이라는 단어의 한가운데에 바로 그 불확실함이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알고는 있었지만 곱씹어보지는 않았던 것이다.


인연. 이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이 단어는 운명이라는 단어와 비슷하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로 한정되어 쓰인다는 점에서 약간 제한적인 게 있다. 그러니까, ‘운명’ 같은 말과는 달리 인연은 사람 사이에서 쓰인다. 노라는 현재의 남편과 처음 연인이 되기 시작할 때 그에게 한국어에 ‘인연’이라는 단어가 있다고 알려준다.

하지만 노라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 된다는 그 말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면서도,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믿으면서도 후반부에 해성에게 이번 생에 우리는 인연이 아닌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해성은 나중에, 나란히 앉아있었지만 노라의 파트너인 아서보다 더 인연 또는 연인 같아 보이는 노라와 해성의 한국어 대화에 함께하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로 자리를 지키던 아서에게, 인연이라는 단어를 아냐며, “우리도 인연인 것”이라고 말한다.


대체 인연이라는 건 뭘까?

노라는 왜 전생에서부터 지금, 그리고 다음 생에도 연결되고 겹쳐질 인연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해성과의 관계는 ‘인연이 아닌 것’이라고 표현하며, 해성은 이번 생에 이러면 다음 생에도 노라와 인연이 아닌 게 아닐까,라고 말하면서도 감정의 교류가 거의 없이 어색한 사이인 아서에게는 우리도 인연인 것이라고 말하는 걸까?


어쩌면 이 단어가 이 관계에서는 쓰이지만 이 관계에서는 쓰이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사람 사이에서 쓰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이란 아주 복잡하고 불확실한 존재니까.



노라는 영화 후반부에서 해성에게 “나는 여기로 떠나올 때, 그때의 나와 너를 한국에 남기고 왔다”라고 말한다. 우리, 사람은 여러 겹이다. 사람마다 두께나 모양 같은 게 다르겠지만 우리는 시간에 따라 쌓인 겹들로 이루어졌다. 아마 노라의 어떤 겹은 여전히 나영의 정체성을 대표할 테고, 또 어떤 겹은 지금 미국에 살며 아서와 함께하는 노라의 정체성을 대표할 것이다. 그래서 노라가 이 말을 할 때, 이들을 보고 있는 나는 노라와 해성의 관계가 더 특별해짐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갑작스러운 헤어짐을 마주했을 때 적당히 친했던 친구들보다 오히려 ‘잘 가’라는 말을 하기에 더 어색하고 힘들 정도로 서로를 좋아했던 그들이, 여전히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던 상태에서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만났을 때 연인으로 이루어지지 못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둘 중 누군가에게 이미 연인이 있을 때일 것이다.

근데 나는, 해성과 노라가 연인으로 이어질 수 없는 이유는 이것 말고 뭔가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정말 현실적으로, 그리고 해성의 말대로 지금 그들 옆자리에 노라의 남편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노라의 말대로 이번 생에 인연이 아니라서 일까?


아니면, 내가 이들을 보며 느꼈던 것처럼 노라와 해성의 관계는 친구나 연인 같은 걸로 표현하기에는 뭔가 다른 무언가가 있는, 그런 불확실하지만 특별한 관계이기 때문일까.


*


노라와 해성의 관계가 불확실하고 특별하게 느껴졌다면, 노라와 아서의 관계는 그 반대 지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확실한, 보통의 관계. 아서도 노라에게 그렇게 말한다. 만약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예술인 레지던스에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노라를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그리고 노라를 만나러 미국까지 날아온 해성을 생각하면, 우리의 관계는 그에 비해 재미있지는 않다고.

하지만,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 그들이 마침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같이 앉아 있었을 뿐일 수 있겠지만, 이 확실한 보통의 관계에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해성이 노라와의 관계에서는 가질 수 없는 무언가일 것이다.


영화는 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있는 해성과 노라와 아서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을 보며 이 세 사람이 과연 어떤 관계일지 재미로 예측해 보는 어떤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린다. 목소리로만. 저 동양인 여자와 동양인 남자가 커플일 거야, 아니면 저 서양인 남자와 동양인 여자가 커플이고 다른 남자는 저 여자의 오빠일 거야, 저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잖아, 등등. 하지만 중간중간 ‘모르겠네’가 끼어들고, 그렇게 결국 ‘정말 모르겠다’로 결론지어진다. 생김새, 표정, 눈빛, 자세, 분위기로는 확신할 수 없을 만큼 뭔가 흔하지 않은 관계인 것 같은 생각을 할 뿐이다.

영화는 이렇게 처음부터 사람의 ‘관계’ 이야기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들은 정말 어떤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 노라와 해성의 관계를 딱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노라와 해성의 관계를 정확히 ‘표현’할 수 없으며, 이들이 인연인지 아닌지 정확히 결론지을 수 없다는 점에서도 이 영화에서 ‘인연’과 ‘언어’는 비슷하게 느껴진다.

언어는 이 영화에서 중요하다. 노라는 처음 12년 후 해성과 재회했을 때, 종이에 한글 자판을 적으며 그와 잘 소통하기 위해 노력한다. 아서는 노라가 자신이 모르는 한국어로만 잠꼬대를 하기 때문에 두렵다고 말한다. 자신은 가지 못하는, 자신이 모르는 곳이 노라 안에만 계속 있고, 이 언어를 알지 못하는 자신은 그걸 함께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한국말을 배우는 거야.”


언어는 한 사람의 세상을 만드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똑같은 세상이 각자에게 또 다르게 보인다. 그래서 노라는 해성과 영상 통화로 대화하며 서울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었고, 아서는 노라와 의사소통에 전혀 답답함이 없음에도 노라의 세상에 지금보다 더 함께하고 싶어서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다. 이렇게 언어는 한 사람을 만드는 것들이기에, 똑같이 한 사람을 만드는 여러 겹의 인연과 닮았다.


해성과 노라와 아서


*


나는 실제로 인간관계를 시작하거나 유지하는 걸 아주 어려워하고 잘 시작하지도 않는 사람이지만, 인간관계의 다양한 모양에 관심은 많다. 아마도 스무 살 이후로 영원할 거라고 믿었던 관계에 실패하고, 생각지 못했던 인연을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오히려 예전에 갖고 있던 관계에 대한 미련이나 욕심 같은 게 없어진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들의 관계가 연인관계로 바뀔지에 대한 설렘은 없었지만 대신, 이 관계의 모양에 설렜다. 이들이 분명히 연인 사이의 사랑 같은 감정과는 뭔가 다른 감정을 서로 공유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뭔가 다르게 설레는 이 감정은, 이들이 그냥 그 감정을 잘 간직하기를 응원하게 되는 특별한 것임에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분명히 그 감정이란 연인 사이의 그것과는 다른, 복잡하지만 어쩌면 아주 단순할 수 있으며, 그렇게 불확실한 그 무언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노라와 해성과 아서, 그리고 지금까지 나를 스쳐 지나갔든 지금도 유지되고 있든 지금까지의 내 세상에 존재해 온 사람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인연이든 인연이 아니든, 전생이 있든 없든, 우리가 뭐라고 확실히 명명할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게 더 분명해짐을 느낀다.


그리고, 표현하기 어려운 그 감정과 관계는 생각보다 더 보편적인 무언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저 뭐라고 부르기 어려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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