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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가든 Apr 25. 2024

그 안의 조각들 <모든 것을 본 남자>

아마 지금의 나는 알 수 없을


살면서 기시감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지만, (나는) 은근히 자주 그런다. 그럴 때마다 ‘내가 그때 미래를 봤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뭐 물론, 나는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도 아니고 그런 기운 같은 것도 없으니 당연히 미래를 ‘본’ 건 아니겠지만, 그런 기분은 든다. 내 삶에, 나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순간들이 떠다닌다고.


요즘 그런 생각을 자주 하던 때였다. 아니, 요즘뿐만이 아니라 예전부터 꽤 자주 해왔던 것 같다. 순간, 기회, 인연, 나의 역사. 최근에 더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고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최근에 본, 그런 이야기를 하는 어떤 영화가 너무 좋아서 계속 곱씹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냥 이렇게 기시감이 드는 순간들이 왜 튀어나오는지에 대해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 상태의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또 생각했다. 또 그 영화 같은 책을 읽을 것 같다고.


근데 읽어보니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그 영화를 3월 초에 봤는데도 지금까지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들으면서 가끔씩 여러 장면들에 대해 또 생각하곤 하는데, 이 이야기에는 그 정도로 깊숙이 빠져들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또 나의 최근 경험을 생각하며 이 글을 쓰게 되는 이유는, 왜인지 이상하게 이 이야기의 조각조각이 머릿속에 남아있는 느낌 때문인 것 같다. 이 책 속에서 기시감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그런 조각들.



*


모든 것을 본 남자, 데버라 리비 (민음사)


주인공이자 화자인 ‘솔’은 스물여덟 살, 애비로드 앞에 서 있다가 자동차에 부딪힌다.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이때의 기억은 스물여덟 해가 흐른 후 또 비슷하게 반복된 (하지만 더 큰) 사고를 당해 대부분의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난 그의 기억 속에서 다시 시작되려 하는 그 무엇이다.


그 기억 속에는 여러 사람이 있다. 왠지 그를 아는 것처럼 보였던 차 주인 ‘울프강’, 카메라를 사이에 둬야만 솔을 볼 수 있다던 연인 ‘제니퍼’, 동독 정부와 솔 사이에 걸쳐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뜨겁게 사랑했던 ‘발터’, 동독에서 나가고자 솔의 도움을 구했던(그래서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루나’, 아버지, 동생, ‘라이너’ 등. 이 사람들은 솔이 이때 이후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 깨어난 중년 솔의 기억에, 시간이 뒤섞인 채 조각조각 나타난다.


같은 사람이지만 스물여덟의 솔과 쉰여섯의 솔은 너무 다르다. 그때는 길을 잃었지만 그대로 계속 길을 잃는 것을 택하는 무모한 청년이었고, 지금은 병원 침대에 누워 과거의 자신과 연인들과 기억을 되찾고 싶지만 그렇지 못함을 느끼는 중년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르더라도 이 둘은 같은 사람이다. 솔이라는 사람 안에 그때의 솔도, 지금의 솔도 있다. 잠깐 잊어버린 그 사이의 솔도 있다. 중년의 솔은 기억을 더듬어 그 사이의 솔을 기억해 나간다. 그러면서 자신 안에 조각처럼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들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혼란스러워한다. 주변 사람들을 보니 기시감 또는 혼란인 것 같긴 한데, 정말 지금 내가 쉰여섯이라고? 그때 누군가가 했던 말이 지금 반복되는 것 같고, 그때와 지금 둘 중 뭐가 진짜인지 혼란스럽다.


솔이 스물여덟 일 때, 그러니까 이야기가 시작되는 배경은 독일 통일 전 동독이다. 슈타지가 사람들을 감시할 때. 저 사람의 사상을 의심하고 동독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사람들을 취조하던 때. 솔은 영국에서 연구차 동독으로 왔고, 이때의 동독을 짧게 경험하는 동안 몇 명의 사람들을 꽤 뜨겁게 겪는다.


그래서 솔이 세월이 흘러서 느끼는 혼란의 중심은 죄책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루나의 파인애플 통조림을 깜빡한 것부터 제니퍼와 발터와 잭을 다 사랑한 것, 발터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낸 것, 등.


자기 목숨을 아낄  모르고 다른 사람 목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118쪽)



*


데버라 리비의 작품들 중 처음 읽은 건 에세이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고, 정말, 아주, 매우 좋았다. 그만큼의 경험이 없는데도 그 글에서 내 경험이 느껴졌다. 앞으로 내가 지금과는 다른 무언가를 경험하며 들 감정들이, 데버라 리비의 경험 속 감정들과 비슷할 것 같았다.


반면 이 소설은 예상외로 어려웠다. 읽으면서 내가 데버라 리비의 말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꼈다. 배경과 형식, 그리고 이 인물들의 은근한 심리가 재미있어서 몰입하긴 했으나 공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근데 중요한 건, 다 읽고 나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이 이야기와 내가 서로 겹쳐지는 감정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옮긴이 홍한별 님 역시 뒤에서 감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주인공에게 완전히 공감을 하지 못했지만, 출간을 준비하며 다시 읽었을 때는 뜻밖의 감정이 몰려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고. 중년의 솔이 더 보였다고.


그래서 나 역시 재미있게는 읽었으나 기대했던 만큼의 공감을 하지 못한 채 책을 덮었지만, 시간이 더 흐른 후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 ‘몰려올 뜻밖의 감정’을 기대하게 된다. 며칠 후면 스물여덟이 되는 내가 지금은 스물여덟 청년의 솔과 그 주변 사람들을 더 봤으니, 나중에는 지금과는 다른 뭔가를 보고 싶은 마음이다. 뭐, 그때도 여전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지금보다 뭔가 더 생길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러니까, 시간을 두고 다시 읽고 싶은 그런 책들이 있지 않나. 왠지 나의 경험-어떤 경험이든지-이 쌓이고 나서 다시 읽으면 조금 더 온전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러고 싶은 책. 이 책이 그런 책이었다. 술술 읽혔지만 어려웠고, 제대로 공감하지 못했는데 다시 읽고 싶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청년기에서 중년기로 훌쩍 넘어온 솔이 본 그 모든 게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은데, 지금 다시 읽어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나중에, 조금 더 내 안에 무언가가 더 쌓인 후에 읽으면 비로소, 어떤 조각 같은 기시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때서야 지금은 아마 알 수 없을 솔의 조각들 중 새로운 조각을 알게 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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