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가 오면 몸이 으슬으슬 떨리면서 컨디션이 급격히 악화된다. 보통 잠에서 일어나자마자 비가 오고 있음을 직감하는데, 지금 딱 그렇다. 비가 내리는 것이 분명하다. 알람을 들었음에도 몸이 쉽게 일으켜지지가 않는다. 침낭 속에서 조금 더 밍기적거리고서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휴대폰 불빛에만 의지해 배낭을 챙긴다. 어젯밤, 침대 머리맡에 널어놓은 빨래가 마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축축하기 그지없는 빨래들을 배낭 속에 욱여넣었다. 평소와 같은 준비 과정을 마친 후 밖으로 나서니 역시나 비가 내리고 있다. 첫날, 판초우의를 사지 않은 잘못을 뒤늦게 후회하며 배낭만이라도 살리고자 레인커버를 씌우고 출발한다.
오르막 길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내리막 길도 있다. 산타렝에 힘들게 올라온 만큼 내려가야 한다. 비 때문에 진흙탕이 된 길에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다. 한 걸음. 두 걸음. 걸을 때마다 꾸덕한 진흙이 기분 나쁘게 신발에 들러붙었다. 내 발은 흘러내린 빗물의 축축함과 동시에 미처 치료하지 못한 물집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며 욱신거렸다. 입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을 간신히 참으며 내리막에서 내려와 마을을 벗어났다.
빗물이 고여 있는 포도밭 사잇길로 웅덩이를 최대한 피해 가는 중에 빗줄기가 갑자기 거세진다. 레인커버를 제대로 덮지 않은 탓에 배낭과 등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었다. 뭐, 이미 충분히 젖어 있는 상태였기에 대수롭지 않았다. 되려 시원하게 내리는 빗소리와 바람에 스치는 포도나무 잎사귀 소리가 여행의 마법을 한층 높여주었다. 여행의 마법이란, 평소 같으면 불평했을 법한 일들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고 오히려 낭만으로 생각하게 되는 마법이다. 요즘은 진지함을 오글거림으로 치부하는 낭만 상실 시대이지만 난 여전히 이런 소소한 낭만을 품고 살아간다.
포도밭 사잇길 멀리서 나이 든 노부부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그들은 비가 옴에도 서로에게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며 붙어서 걷고 있었다. 서로의 속도에 맞춘 발걸음은 나보다 느렸지만, 그들의 속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듯했다. 그들을 홀린 듯이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비가 그쳐간다. 비 구름 사이로 다채로운 색채의 무지개가 반원 모양으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을 보곤 감격에 벅차올랐다. 역시 여행은 예기치 못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음이 분명하다.
비가 그침에 스패츠와 우비를 벗으면서 서로에게 장난치는 노부부를 지나치며 인사를 하곤 무지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순간 그들의 눈동자가 찬란한 무지개 빛으로 물들었다.
날씨가 갠 뒤 찌는 듯한 더위가 찾아왔다. 와인 산지답게 포도밭은 너무도 커서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하염없이 걷다 보니 신발에 들러붙던 진흙이 바짝 말라서 내 발목을 잡았다. 힘이 들었지만, 쉴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그때, 저 멀리 큰 농작물 창고가 보였다. 잠시 쉴 수 있겠거니 하고 다가가는데 창고 앞 길목에 조그만 치와와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그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더니 신경질스럽게 째려본다. 계속되는 신경전. 먼저 정적을 깬 건 그 녀석이었다. 조그만 녀석이 화통을 삶아 먹었는지 조용한 포도밭을 다 매울 정도로 짖는다. 내 주위를 빙빙 돌면서 위협하며 이따금씩 종아리를 물려고 했다. 한대 콩 쥐어박고 싶지만 농작물 창고의 작은 파수꾼이 자기 역할을 다 하는 건데 뭐 어쩌겠는가. 어쩔 수 없이 쉬지 못하고 창고를 벗어나니 작은 파수꾼은 의기양양한 걸음질로 돌아갔다. 그 모습이 퍽 웃겼다.
오늘의 목적지인 골레가까지는 지도상으로 마을이 2개가 있다. 파수꾼 덕분에 쉬지 못하고 걸으니 어느새 첫 번째 마을에 도착했다. 교회 앞 벤치에 앉아 신발에 묻은 비의 흔적을 털어낸다. 자세히 보니 양말과 정강이에도 잔뜩 묻어 있다.
교회의 종소리가 잔잔히 마을에 울린다. 마을의 분위기가 좋아서 꽤 오래 앉아 있으니 아까 뵀던 노부부가 지나간다. 내게 괜찮냐며 묻는 물음에 애써 미소를 짓고 그들을 보낸다.
레인커버를 벗기고 다사 배낭에 넣은 뒤 다시 길을 나선다. 조금 멀리서 내가 앉아 있던 벤치를 바라보니 그 자리는 벌써 다른 아저씨로 채워져 있었다.
나만 힘든 구간이 아니었구나.
- 나도 누군가와 이 길을 함께 걸을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