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아침은 분주하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어나서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혹여나 다른 순례자들이 내 분주함을 눈치챌까 봐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어둠 속에서 옷을 입고, 무릎 보호대를 차고, 신발을 신고, 침구류를 정리한다. 배낭에 물건을 넣는 소리가 어두운 벽을 타고 방을 울렸다. 어쩔 수 없이 공용 거실에 물건들을 빼놓고 짐을 정리한다. 작별 인사도 없이 출발하는 게 아쉽지만 목적지는 같으니 금방 다시 만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밖은 어두웠다. 걷다 보니 곧이어 반가운 순례자 화살표가 보인다. 어김없이 시작된 하루. 분명 밖을 나설 땐 별들이 선명하게 보였는데 어째서인지 Azambuja를 벗어 나니 서서히 안개가 끼기 시작한다. 안개는 순식간에 나를 감싸 안았다. 안갯속을 혼자 걸으니 오싹한 기분이 들어,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다 보니 포근한 흙 길이 나왔다. 밭 사이로 길게 쭉 뻗은 일자 길이었는데, 안개 때문인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로 서서히 해가 뜬다. 해의 동그란 민낯이 관능적으로 보였다. 안개 입자 때문인지 해는 이따금씩 원반 모양으로 보이기도 했다. 물에 붉은 물감을 한 방울 떨어뜨리듯 주변을 서서히 붉게 물들어갔다. 푸르스름한 어둠이 점점 끝으로 밀리는 모습은 상당히 몽환스러웠다. 몽환스러운 분위기에 내가 취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바뀌지 않던 시야 끝 너머 도로에 어떤 검정 형체가 보였다. 이것들은 마치 거인처럼 엄청나게 커졌다가 이내 다시 작아지고, 점점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다시 멀어졌다. 신비로운 꿈속을 거니는 기분이었다. 거인이라고 생각했던 그것들은 결국 커다란 나무들이었음을 길 끝에 달하고서야 알았다. 생전 처음 겪는 진귀함에 피로감이 느껴져 T자형 길 가운데에 앉아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다음 마을인 Valada까지는 아무것도 없다. 마켓도, 식당도 심지어 화장실도. 길을 가는 동안 사람 한 명 보지 못했다. 가끔씩은 차가 지나다녔는데, 혹시 나를 못 볼까 봐 길 가장자리에 붙어서 차가 지나가면 팔을 들어 내 존재를 알렸다. 친절하게도 라이트를 한번 켜주는 운전자들. 가장자리에 붙어서 길을 가니 발에 토마토가 자꾸 차인다. 엄청난 크기를 가진 이 밭에는 토마토가 경작되었나 보다. 지금은 휑하지만 토마토 밭이었음을 상상하며 걸으니 지금 걷는 길과는 사뭇 대조된다. 싱그러운 초록빛과 빨간 토마토, 쏟아지는 포르투갈의 태양, 그에 빛나는 정열적인 땀방울들이 느껴진다. 물론 지금은 어딘가 색조를 최대로 낮춘 죽은 땅처럼 느껴지지만... 그 때문인 걸까? 오늘도 수많은 파리들이 날 괴롭힌다. 몸에 맞지 않는 부품을 부착한 듯, 발바닥에 붙어 있는 물집밴드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3일 차인데도 힘듦이 적응되지 않는다.
Valada에 도착하니 거짓말처럼 화창해졌다. 자그마한 마을은 슬로우 라이프를 지향하듯 모든 것이 느리게 느껴졌다. 마당에 드러누운 강아지와 제 집처럼 길에서 휴식을 취하는 고양이들. 느릿느릿 집 지붕을 수리하는 주민들의 모습까지 사랑스러웠다. 나도 신발과 양말을 벗어 그들처럼 벤치에 누웠다. 속도에 채이지 않는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간다. 이 여유를 오롯이 즐겼다. 한껏 상쾌해진 발걸음으로 흙 길을 따라, 어느새 돌 길로, 강을 지나 또다시 농작지를 걷는다. 안개가 걷히니 아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확실히 높은 건물이 없다 보니 멀리 있는 것들이 빨리 보인다. 시원하게 펼쳐진 평원 가운데 거짓말처럼 그네가 있다. 그네 위에는 글이 써져 있는데 뭔지 모르겠다. 그네를 타는 와중 토마토처럼 빨강 가방을 짊어진 순례자가 나를 카메라로 찍어갔다.
오늘의 목적지인 Santarem이 보인다. 눈에 보이지만 도저히 닿을 것 같지 않는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이때의 나는 꽤나 지쳤었는데 마지막 오르막 길은 정말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서 죽기 직전이었다. 왜 마을이 멀리서부터 보이나 했더니 경사가 과장 보태서 78도 되는 고지대에 있었다. 어찌어찌 오르막 길을 올라 마을에 들어서서 곧바로 성당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를 찾았다. 하지만 애써 도착한 공립 알베르게는 운영을 하지 않았고, 그곳에 계신 신부님이 다른 숙박 시설을 알려줬다.
'혹시 방이 없으면 어떡하지.. 아 오늘 괜히 많이 쉬어서..'
라고 자책하며 도착한 다른 알베르게는 아까는 보지 못한 많은 순례자들이 로비에 앉아 있었다. 분명 날 지나친 순례자는 한 명뿐이었고 아잠부자에서 같이 하루를 보냈던 순례자들은 심지어 없는데 어디서 나타난 걸까. 조마조마한 마음을 달래며 체크인 순서를 기다렸다.
"예약을 안 했는데 혹시 방 있나요?"
"네 다행히 두 자리 남았네요. 한국인이에요? 멋지네요"
나이가 지긋하신 백발의 할머니께서 내 크레덴셜에 도장을 찍고 이름을 적어주며 말을 건넸다. 이후 남편처럼 보이는 할아버지가 어딘가에서 나타나시더니 친절히 내 방까지 안내해 주신다. 안내를 받아 도착한 방은 2층 침대가 3개가 놓이니 꽉 찰 정도로 작았다. 마른 땀을 씻어내기 위해 짐을 놓고 곧바로 샤워를 한 후 숙소 근처 마켓에서 대충 끼니를 샀다. 고딕양식의 좋은 표본인 상 프란시스쿠 수도원이나 산타 마리아 다 그라사 수도원 등 오랜 역사를 지닌 산타렝은 과거 영광을 잘 간직한 여타 다른 도시처럼 빈티지하고 고풍스러운 매력을 지녔다. 특히 테주강을 품은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 풍경이 좋다는 글을 읽었는데 내겐 도무지 갈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독자가 기회가 생긴다면 꼭 방문해 보길 바란다.
숙소 루프탑에 앉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정겨운 멜로디를 들으며 저녁을 먹으니 서서히 붉은 노을이 진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어간다.
오늘 하루 34.11KM를 걸었다.
- 안갯속을 거니는 몽환적인 경험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