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1: 둘째 날 아침

by Gi

아직 남아 있는 설렘이 밤보다 길어서, 잠을 설쳤다. 내 몸 상태와는 상관없이 아침 해는 떠오른다. 3일 치 일정을 이틀로 줄여서 소화하는 나로서는 어물쩡거릴 시간이 없다. 더군다나 오늘부터는 공립 알베르게에서 숙박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찍 출발해야 한다. (공립 알베르게는 사설 알베르게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예약이 불가능해서 선착순으로 운영된다) 피곤을 물리치기 위해 침대에서 간단히 스트레칭을 해주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밖을 나섰다.

전날 산 바라클라바


아침 6시의 포르투갈은 어두웠다. 쌀쌀할 줄 알고 챙겨 입었던 겉옷이 무색하게 춥지 않다. 호젓하게 켜진 가로등이 구름에 걸린 달을 비추었다. 어제 사두었던 아침을 먹으며 하늘을 보니 한국에서 보던 위치가 사뭇 다르다. 나는 그대로인데 별이 움직인 건지, 내가 바라보는 방향이 달라진 건지 모르겠다. 식어버린 딱딱한 빵을 씹으며 발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물집이 발 한가운데 크게 잡혔는데, 바늘이 없어 터트리지 못했다. 노란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을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걸으며 물집이 자연스럽게 터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둘째 날 순례. 여명이 트는 새벽햇살이 나무의 시커먼 윤곽을 파스텔 톤으로 비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간직하고 싶어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는데, 초대받지 않은 자들이 내 피부에 무단으로 침입했다. 악랄한 이들은 사진을 찍는 그 잠깐 사이에, 내 소중한 피를 훔쳐간 것도 모자라 저마다의 표식을 남겼다. 이상하리만큼 표식이 있는 자리는 퉁퉁 부었고 간지러웠다. 남은 녀석들 만이라도 손으로 털어봤지만 녀석들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남은 피를 훔치거나, 심지어 어떤 녀석들은 건들든 말든 여의치 않고 피를 훔쳤다. 순간 열이 받아 다 잡고 걸을까 하다가 수가 너무 많아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는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는 게 상책이기에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해가 뜨기 시작한다


Alhandra에 도착하니 타구스 강이 다시 보였다. 강을 따라서 빨간 트랙이 길게 이어졌는데, 왼쪽 벽면에는 다양한 예술 벽화를 그려 놔서 산책 공간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실제로 이른 아침임에도, 동네 주민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작은 검정 강아지와 산책하며 내게 아침 인사를 건넨 빨간색 져지가 인상적인 아저씨, 동화 속에 나올 법한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걷던 키가 작은 아주머니, 러닝을 하며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인사하는 인싸 여성과 저마다 개성 있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 벤치에 앉아 일출을 보며 여유를 즐기는 사람까지. 그들의 일상을 체험한 느낌이었다. 만약 조금 더 일찍 걸었다면 떠오르는 해를 건물 사이가 아닌 타구스 강에서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해가 떠오를수록 강에 비춘 빛줄기가 길어지며 윤슬이 더 반짝거렸다. 기찻길 앞 공원 벤치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물을 마시는데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들. 나 또한 한국에선 저런 모습으로 누군가에게 비쳤을까?


어제 경험해 본 바, 휴식이 길어지면 당장은 편할지언정 앞으로는 더 힘들어진다. 힘들게 끌어올린 신경 흥분도가 같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이번엔 지평선 너머로 끝이 보이지 않는 기찻길이 나왔다. 기찻길 옆 돌길은 걸으며 혹시 기차에 차인 돌이 날아오진 않을까 걱정될 만큼 바짝 옆에 붙어 있었다. 어느새 해는 중천, 해는 돌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물집 잡힌 발에 차이는 달궈진 돌과 이베리아 반도의 특유의 뜨거운 햇살이 정신없이 나를 괴롭혔다. 잘 익은 벼처럼 고개는 저절로 숙여졌다. 그 모습이 사뭇 시체처럼 보였을까? 쇠파리가 내 귓가에서 왱왱 소리를 낸다. 모기 다음은 파리였다. 기차가 지나갈 때 나는 시끄러운 소리 빼고는 주변은 무척이나 고요해서 쇠파리 소리가 몇 배는 크게 들렸다. 정말 고역이었다. 아무리 손을 휘젓고,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도무지 떨어지질 않았다. 왜 과거 사람들이 악마를 파리의 모습으로 그렸는지 알 것도 같았다. 파리는 악마 그 자체였다. 기찻길은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흘린 땀은 옷뿐 아니라 배낭까지 적셔 어깨를 더욱 죄였다. 온몸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러 댔는데 땀에 젖은 귀 옆에서는 작은 악마가 포기해라고 계속 속삭였다.

이 소리를 계속 듣다가는 정말로 포기해 버릴 것 같아서, 차라리 정신을 다른 곳에 돌리기로 했다.

국화가 왜 여기에...


우선 눈에 보이는 것에 먼저 집중했다. 개미들이 줄 지어 자기 몸무게에 20배나 달하는 먹이를 운반하고 있었다. 어느 작가는 인간보다 뛰어난 개미의 장점으로 개미는 힘든 일이 있을 때 다른 개미를 탓하지 않고 오직 해결에 몰두하는 반면에 인간은 남 탓을 하다가 정작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개미들은 이 땡볕에서 군말 없이 각자의 임무를 완수하는데 나는 왜 내가 나약한 것을 환경 탓, 배낭 무게 탓을 하고 있는 걸까? 개미가 주는 메시지를 불쏘시개 삼아 열정에 불을 지펴 1시간을 내리 걸었다.


힘듦을 이겨낼 다음 장작이 필요했다. 눈을 이리저리 돌리니 달팽이가 보였다. 느릿느릿 목적지까지 등에 짐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모습이 나와 같았다. 속도의 논리로 움직이는 세상 만물에서 달팽이만은 온몸으로 세상을 품으며 느림의 미학을 외치고 있었다. 남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올곧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너나 나나 목표에 도달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달팽이를 바라보는 시선 끝에 빨간색 가재가 보였다. 어? 가재? 주위에 물이 있나 하고 두리번거리며 찾아보는데 보이지 않는다. 아마 오른쪽 보이는 갈대 너머 타구스 강이 있나 보다. 걸으면서 종종 보이던 멀쩡하게 다니는 가재는 몇 마리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말라비틀어져 주검이 되어 거리의 청소부의 먹이가 되었다. 중간에 힘들다고 멈추면 나도 저리 될 것 같아 얼른 발을 옮겼다. 그 외에도 잠자리, 두루미, 이름 모를 무리 지어 날아가는 새들까지. 생과 사의 기준 가운데서 모든 것들은 각자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세계의 일부였다.


걷는 내내 쉴 공간이 없어서 쉬질 못하고 있는데 아무도 없는 기차역이 나왔다. 천근 같은 배낭을 집어던지고 신발과 양말을 벗은 후 벤치에 누웠다. 땅만 보며 걷다가 푸른 하늘을 바라보니 눈이 부셨다. 구름이 느긋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1.5L패트 물을 다 마셔서 남은 물은 물병에 있는 수돗물뿐이다. 남은 거리는 대략 10km. 1시간에 5km 정도 걸으니 2시간 정도 남았다. 물이 다 떨어지기 전에 다음 마을에 도착해야 한다. 주황색 형광조끼를 입고 기차역 전등을 수리하는 아저씨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일으켜 다시 출발한다.


- 모든 것은 각자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간다 -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