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 밖으로 나왔다. 황량한 돌 길이 다시 또 이어진다. 아까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아까는 보이지 않던 큰 배낭을 짊어진 사람이 저 멀리 앞에서 걷고 있다는 점이다. 배낭이 사람을 잡아먹은 듯 우악스러운 것 보니 까미노가 분명했다. 말이라도 나누면 이 힘듦을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걸음을 재촉한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물집 안에 있는 물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땀에 젖은 배낭도 걸음 박자에 맞춰 위아래로 흔들린다. 고통을 참으며 발을 내딛지만 야속하게도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다. 걸어도 걸어도 콩알만 한 형체가 도무지 커질 생각이 없다. 이따금씩 나는 돌 위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때문에 신기루를 보는 건가 하며 눈을 의심했다. 그러기를 1시간, 나도 모르게 까미노를 경쟁자로 인식했나 보다. 알 수 없는 승부욕이 내 안에 피어났고, 이것은 피로를 대가로 내게 힘을 빌려줬다. 물집의 고통을 잊고 그저 따라잡겠다는 열망만이 내게 남아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혼자만의 경쟁.
하지만 까미노는 어찌나 빠른지, 결과적으론 그 사람을 따라잡지 못했다. 졌다는 의식이 나를 잠식할 찰나 힘듦을 나누겠다는 처음 의지와는 다르게 분해하는 내 모습을 보고 놀랐다. 승부욕이 강한 내 모습을 처음 마주한 순간이었다. 크게 심호흡한 후 지옥 같던 기찻길을 벗어나 Azambuja에 들어섰다.
마을은 매력적인 경관을 지녔다. 햇살 덕분에 포르투갈 집 지붕 특유의 주황빛 고즈넉한 색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표지를 따라 큰 차도를 지나 작은 골목길에 들어서니 알베르게가 보였다. 기쁜 마음에 나는 듯 문 앞에 서니 굳게 잠겨 있었다.... 설마 운영을 안 하나?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니 벽면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전화하려는 찰나 뒤에서
“건. 내가 먼저 전화했어. 숙소 주인은 아마 30분 뒤에 올 거야”
뒤에서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니키였다. 그녀는 숙소 건너편 오르막 계단에서 신발을 벗고 책을 읽으며 앉아 있었다. 내가 경쟁자로 인식했던 사람이 니키였다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녀 옆에 배낭을 내려놓으며
“그거 알아요? 난 당신 뒤에서 경쟁자로 생각하면서 따라왔어요. 결국 따라잡진 못했지만.”
살짝 미소 지으며 그녀는 말했다
“좋은 거야. 이기려는 마음이 나쁜 마음은 아니잖아. 그리고 우린 결국 함께 도착했네.”
그녀에겐 나한테선 찾을 수 없는 어떤 연륜이 느껴졌다.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 이게 순례길이 주는 선물이구나.
나도 그녀처럼 신발과 양말을 벗고 한숨 돌리니 그제야 내 몸 상태를 돌아볼 수 있었다. 발바닥 물집은 아침보다 커져서 발 접지면 대부분이 물이 차 있었다. 어깨 또한 배낭에 짓눌린 자국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내 배낭 무게는 17kg. 보통 배낭 무게는 자기 몸무게에 1/10이 적당하지만 난 순례길 이후에 여행 계획이 있어서 이것저것 더 챙긴 게 화근이었다.
발가락 사이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그녀와 이야기 나누는 동안 굳게 닫힌 알베르게 문이 열렸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나는 자원봉사자고 공립알베르게는 자원봉사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어. 비록 시설은 다른 호텔보다는 안 좋은 건 사실이지만 호텔에는 없는 뭐랄까.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을 잇는 어떠한 끈은 여기에 존재해. 필요한 게 있으면 나는 여기에 7시까지 있으니 언제든지 말해.”
넉살 좋은 웃음을 지닌 숙소주인은 니키와 내 크레덴셜에 도장을 찍어주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숙소 내부를 천천히 안내해 주고 원하는 침대를 고를 수 있게 해 줬다. 그가 말한 것처럼 숙소는 호텔이라기보다는 가정집 같았다. 그래서인지 포근하고, 마음이 놓였다.
나는 문과 가까운 침대에 짐을 풀고 샤워를 한 후 땀에 젖은 옷을 빨았다. 마당에 있는 빨랫줄에 옷을 널고 거실에서 다른 순례자를 맞이하는 그에게 혹시 바늘이 있냐 물어봤다. 물집을 터뜨려야 내일 걸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래된 수납장 맨 위칸에서 구급상자를 꺼냈다. 구급상자 속 물건들을 다 꺼내봤지만 바늘은 없었고, 내 물집을 본 그는 숙소 근처에 있는 약국을 추천해 줬다.
나는 곧바로 그가 알려준 약국으로 향했다. 약국은 오래된 교회 건너편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래되어 보이는 외관과는 다르게 무척 깨끗했다. 두리번거리니 흰 가운을 입은 젊은 여성 약사가 내게 밝은 표정으로 인사한다.
나는 그녀에게 순례자임을 밝히고 물집 잡힌 발을 보여주니 그녀는 곧바로 물집 밴드를 가져다줬다. 나는 빠른 처치가 급했기에 혹시 물집을 터트릴만한 날카로운 것을 요구하니 잠시 고민하더니 주사기를 꺼내준다.
"혹시 여기서 물집을 터뜨려도 될까? 예의가 아니지만..."
"당연하지. 혼자 할 수 있겠어? 지금은 손님이 없으니 내가 도와줄게."
그녀는 검정 의자를 꺼내와 나를 앉히더니 흰 장갑을 꼈다. 그리고 능숙하게 주사기로 내 양발에 있는 물집을 터트렸다. 보통 처음 본 사람의 발을 만지기는 쉽지 않은데 그녀는 서슴지 않았다. 낯선 타지에서 이토록 친절함을 받음에 너무 감사했다. 마지막으로 밴드를 붙여주는 그녀에게 치료비를 더 내고 싶다고 하니 한사코 거부했다.
"이건 당연한 거야.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어. 앞으로 남은 순례도 힘내."
인류애를 잔뜩 충족하고 한껏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약국에서 나와 마켓으로 가는 길에 원망스럽던 기찻길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하늘과 어우러져 적잖은 풍경을 뽐냈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랬나. 같은 기찻길이지만 느껴지는 감정은 달랐다.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작은 마을이지만 마켓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 배가 고팠던 나는 맥주 한 캔과 프로틴 음료와 빵을 바구니에 담았고, 윙봉 1kg을 구입했다. 다 해도 20유로가 되지 않았다. 근처 공원에서 가볍게 캔맥주 하나와 윙봉을 먹고 있자니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입견은 무섭다. 사실 여행 오기 전 동양인 비하를 당했다는 사람들의 글을 보고 많은 걱정을 했다. 특히나 포르투갈 사람들은 잘 웃지 않고 무뚝뚝하다고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사람들은 무척 친절했다. 오히려 포르투갈 사람들도 스페인어를 쓰는 줄 알고 계산을 도와주는 마켓 직원에게 'Gracias'라고 말한 내가 더 부끄러웠다. 그녀는 웃으며 포르투갈은 남성은 'Obrigado' 여성은 'Obrigada'라고 인사한다고 설명해 줬다. 직접 경험해 보는 건 역시 중요하다.
어느새 저녁이 됐다. 혼자 침대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며 노트북에 기록하고 있을 때 뒤늦게 체크인한 세 명의 남성이 내게 맥주 한잔 하자며 말을 건네왔다. 나는 흔쾌히 함께하겠다고 말하고 니키까지 합류했다. 그들과 아까 봤던 오래된 교회 앞 광장에 있는 바에 갔다. 아까는 없던 테이블과 의자가 교회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들은 이번 카미노가 두 번째라고 한다. 24살의 어린 친구가 순례길을 걷는 게 신기했는지 까미노를 어떻게 알게 되었냐, 왜 까미노를 걷느냐 등 여러 가지를 내게 물어봤고, 그들의 질문에 답을 하면서 나도 다시금 생각 정리가 되었다.
그것은 분명 속마음을 내뱉으면서 얻는 말의 힘이었고, 내겐 다시 원동력이 될 참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내가 걸으며 느낀 감정들을 나처럼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글로 써서 응원하는 책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내 생각이었다. 그들은 한국작가가 쓴 책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고 만약 책이 나온다면 자기들에게 번역해서 보내달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작가명도 추천해 줬다. '건마이웨이'.
서늘한 밤공기와 시원한 맥주, 오늘의 힘듦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시간이 쏜살같이 간다. 다른 삶, 다른 환경, 다른 주관, 다른 방향성, 공통점은 오로지 이 길을 함께 걷는 것. 그것 하나였다.
니키가 크레덴셜을 구매해 준 것이 고맙다며 이 자리를 계산했다. 고마워요 니키.
오늘 하루 33.59KM를 걸었다.
- 생각을 말로 뱉으니 원동력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