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껏 가벼워진 몸으로 가게를 나선다. 마을을 벗어나면서 순례길은 술기운에 걷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술례길로 이름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앞으로는 힘들 때마다 알코올에 의존해야지 생각하기를 잠시, 취기는 가시고 갈증이 찾아왔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기분으로 갈증을 물리치기 위해 물을 얼마나 넣었는지 모르겠다. 언제 또 다음 마을이 나올지 모르기에 최대한 물을 아껴야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갈증과의 전쟁 중 오늘 밤을 지낼 숙소가 구글 지도상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호외가 들려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갈림길 앞 순례자 화살표는 숙소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발은 불이라도 붙은 듯 뜨거운 상황. 갈증과의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내게 선택이 강요됐다.
눈앞에 결과가 보이는 안전한 편한 길?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길?
잠시 멈춰 서서 고민했다.
나는 순례자 화살표를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약간의 반항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내 부모님께서는 내게 안정된 삶을 권유했다. 남들처럼 대학을 나와서 남들처럼 공무원을 준비하고, 남들처럼 결혼을 해서 남들처럼 살기를 바랐다. 내게 모난 곳 하나 없는 올곧은 직선이 되길 바라셨다. 계란 공장에서 아무 탈 없이 선별된 예쁜 모양의 계란이 되길 바라셨다. 그런데 그런 삶에 나란 존재는 어디 있을까. 나는 정해진 레일에서 벗어나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은 직선 같은 레일 위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그 앞이 무엇이 있을지 모를지 언정. 불안과 고난이 가득한 삶일지 언정. 흙이 묻고, 물에 젖고, 짓밟혀서 성숙해지지 못한 채로 알이 깨질지 언정. 그것마저 내가 선택한 결과라고. 공장에서 찍어낸 계란처럼 살다가 계란프라이가 되기 싫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건 내 소심한 반항의 첫걸음이다. 나는 과감히 현대 문명의 산물인 구글맵을 끄고 앞으로의 순례에선 절대 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마음을 다잡고 화살표를 따라가니 길고 긴 데크길이 나왔다. 칙칙한 색깔의 갈대와 다시 마주친 타구스 강의 새파람의 대비가 일품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순천만 갈대밭을 연상케 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뜨거운 태양빛을 무럭무럭 먹은 갈대의 높이는 내 키의 3배였다. 양 옆 갈대 벽 사이로 길을 가는데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쉴 수 있는 벤치도 없다. 정글 숲을 탐험하는 듯했다. 갈증 때문에 힘들어서 냅다 길바닥에 앉아 마지막 남은 물을 다 마셨다.
갈대숲 사이로 자전거 세 대가 오는 게 보인다. 지나가기 편하도록 길 가장자리로 배낭을 옮기고 누워 있으니 내 앞에서 자전거를 멈춘다.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내가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자기들끼리 시시덕 거리더니 자전거 묘기를 부린다. 말을 걸고 싶지만 도무지 힘이 안 나서 죽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재미없다는 듯 이내 다시 자전거를 타고 가버린다. 나는 다시 일어나 걷고 또 걸어서 오늘의 목적지 Alverca do Ribatejo에 도착했다.
곧바로 처음 봐두었던 숙소로 향했다. 숙소 주인에게 방이 있냐고 물어보는데 방이 없단다. 제일 아끼는 솜이불을 누군가에게 뺏긴 듯한 상실감이었다. 숙소 주인은 세상 다 잃은 내 표정을 보곤 안타까웠는지 저기 언덕을 내려가면 다른 숙소가 있으니 한번 가보라고 했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해는 저물고 있었다. 절뚝거리며 알려준 다른 숙소에 도착하니 노란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방이 있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나는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어서 배낭을 내려놓고 그들 뒤에서 죽은 듯 누워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데 여직원은 그들에게 방이 없다고 했다. 되돌아가는 인부들을 보며 망연해 있던 중 누워 있던 나를 보며
"순례자세요?"
"네.. 방을 예약을 안 해서 잘 곳이 없어요. 혹시 남는 방이 있나요?"
이내 잠시 고민하던 여직원은
"옥탑방도 괜찮으세요? 원래 내주는 방이 아니라 살짝 더럽긴 한데.."
"잘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아요. 부탁드릴게요."
아마 날 이대로 내보내면 객사할 것 같았나 보다. 그녀는 맨 꼭대기 층 작은 방을 내어주며 저녁을 먹을만한 레스토랑을 추천해 줬다. 그녀는 날개만 안 달렸지 내겐 천사나 다름없었다. 방은 침대와 책상이 간신히 들어가는 1평 정도의 크기였고 거미줄과 먼지가 잔뜩 낀 창문이 천장에 있었다. 천국이었다. 천사가 안내해 줬으니 천국이었다. 배낭을 내려놓은 뒤 샤워와 손빨래를 하고 여직원 추천해 준 식당으로 향했다.
터덜터덜 1층으로 내려가는데 오늘 같이 출발한 3명 중 한 명인 통통하고 웃는 모습이 귀여운 금발 머리 40대 여성 분과 마주쳤다. 반가워 발을 동동 구르며 오늘 하루는 어땠냐고 서로 안부를 물었다.
"진짜 죽기 직전이에요."
"발 스트레칭을 꼭 해줘. 그래야 내일도 걸을 수 있어."
웃으면서 말하는 그녀는 나와는 다르게 멀쩡해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멀쩡하세요? 체력이 대단하세요"
"아 나는 중간에 힘들어서 버스 타고 왔어. 첫날부터 무리하면 다음부터 힘들거든. 점프를 하면서 자기 페이스를 맞추는 거지."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아닌가 이게 현명한 건가. 이미 식사를 마친 그녀와 인사를 마치고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은 현지인들로 북적였다. 아는 포르투갈 언어는 아침인사와 감사합니다 밖에 몰라서 주문을 못하고 있었는데 멋진 수염을 가진 웨이터가 친절하게 영어로 순례자용 메뉴를 설명해 줬다. 단돈 11유로에 식전 빵, 수프, 고기, 음료, 디저트까지 포함이었다. 나는 수프를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이 날 먹은 이름 모를 수프는 아직도 기억날 정도로 맛있었다. 살짝 딱딱한 빵을 따뜻한 수프에 찍어서 먹으니 입안에서 녹듯이 부드러워졌고, 노릇하게 잘 구워진 비프스테이크와 감자튀김을 시원한 맥주와 함께 마시니 미슐랭 맛집 저리 가라였다.
과일 디저트까지 남김없이 다 먹고 나서 내일 먹을 아침을 구매하기 위해 근처 마켓에 가서 빵과 우유, 바나나를 구매하고 오늘의 보금자리에 돌아와 하루를 기록한다.
천장에 달린 창문에서 은은한 달빛이 쏟아진다. 사람은 저마다의 페이스가 있다. 숙소에서 만난 그녀처럼 점프를 한다면 몸은 편할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그게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녀가 보지 못한 내 키보다 큰 갈대밭을 봤다. 타구스 강처럼 길게 쭉 뻗은 데크길을 걸었다. 난 그녀가 하지 못했던 경험을 했다. 선택이 옳았는지는 남들이 아닌 내가 판단하는 것이다. 항상 시작이 두렵지 막상 해보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첫 날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오늘 하루 38.46KM를 걸었다.
- 알은 새의 세계이다. 난 오늘 알에 금을 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