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2: 노란 화살표를 따라서

by Gi

산티아고를 향하는 노란 화살표는 누가 처음 그렸을까.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순례길의 역사에서 노란 화살표가 도입된 것은 의외로 비교적 최근이다.

1984년, 오세브레이로의 신부 엘리아스 발리냐가 처음으로 노란 화살표를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순례길은 가는 길이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않아 많은 순례자들이 길을 잃곤 했다. 발리냐 신부는 도로 공사에서 남은 노란 페인트를 이용해 프랑스에서 산티아고까지 이어지는 길을 표시하기 시작했고, 행위가 널리 퍼져 다양한 순례길 루트를 형성했다. 이런 귀찮음을 마다한 그의 작은 노력이 오늘날 우리 순례자들의 길잡이가 되어준 것이다. 길잡이는 비단 노란 화살표뿐 아니라, 길가에 쌓여 있는 돌멩이들의 탑, 나무에 걸려 있는 옷가지, 밤하늘 수놓은 별자리까지 해당된다. 오히려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이 오랜 기간 순례자들의 이정표가 되어줬다.


성당을 나서자 벽 구석에 그려진 화살표를 보며 잠시 설렘으로 고조된 감정을 다스렸다. 나는 노란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10분 정도 걸었을까,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뉜 큰 광장에 도착했다.

길이 너무 많아서 잠깐 멈춰 화살표를 눈으로 찾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아까 그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는 웃으며 손짓으로 화살표를 가리켰고, 그제야 화살표가 내 눈에 들어왔다.


"화살표를 잘 찾는 게 순례자에게 가장 필요한 스킬이에요"


이번이 두 번째 순례인 그녀는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니키. 자연스럽게 니키와 동행하며 그녀는 이것저것 순례길 정보에 대해서 말해줬다. 가령 순례자들끼리는 '부엔 까미노(Buen Camino)'라고 인사한다는 점. 이는 단순히 인사말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 자신의 페이스를 잘 찾아야 한다는 점 등 순례가 처음인 나에게 많은 조언을 해줬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좁은 리스본의 거리를 함께 걸었는데, 걷다 보니 리스본은 도보 여행자들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한국과 달리 울퉁불퉁한 돌이 박혀 있는 인도는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만큼 좁았고, 도로 폭 또한 좁아 차와 스치듯이 다녀야 했다. 운전자는 항상 사람이 먼저 지나가도록 배려해 줬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었고, 특히나 큰 배낭을 메고 다니는 우리는 더욱 위험했다. 실제로 고개를 뒤로 돌렸을 때 큰 트럭이 코앞에서 지나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렇게 리스본 중심지를 벗어나니 어느덧 안내책자를 든 관광객보다 마켓봉투를 든 현지인들이 많아졌다. 나는 가는 길에 있을 데카트론 매장에서 판초우의를 구매해야 했기 때문에 니키에게 말했다.


"같이 가줄 수 있는데."

"아니에요, 여기서 조금 돌아가야 해서요. 다시 만나요!"

"그래, 부엔 까미노."

"부엔 까미노!"



니키와 작별 인사를 한 후 화살표를 잠시 벗어났다. 길을 벗어나서 육교에 올라 조금 걸어가니 데카트론 매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매장에는 내가 원하는 일체형 판초우의는 없었고, 대신 스포츠용 바라클라바를 구매했다.

... 설마 비가 내리겠어?



다시 화살표가 가리키는 거리로 돌아왔을 때, 네 개에서 두 개로 줄어든 눈으로 노란색 화살표를 찾아 걸으니 효율이 떨어진 기분이었다. 이리저리 걸으며 복잡한 리스본에서 벗어나니 새파란 타구스 강이 눈앞에 펼쳐졌다. 타구스 강의 총 길이는 1,038km. 대서양으로 길게 뻗어 있어서인지 왠지 모르게 바다 내음이 났다. 강을 보며 여유러움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로 타구스 강과 나란히 걷다 보니 긴 교량이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바로 유럽에서 제일 긴 다리로 개통 당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된 바스쿠 다 가마 다리였다. 인도 항로를 발견한 포르투갈 항해가의 저명한 이름을 딴 이 다리는 길이가 연결다리까지 포함하면 무려 17km가 넘는다고 한다. 직선인 수평선과는 대비된 커다란 아치형 형태의 구조물은 곡선으로 길게 수평선 너머로 뻗어갔는데, 그것은 마치 인도 대륙에 닿을 듯이 보였다.


타구스 강을 지나니 오솔길이 나왔다. 동시에 시끄러운 도시 소음이 잦아들고 자연의 소리가 내 귀를 채웠다. 지저귀는 새소리, 짓밟힌 나뭇잎의 비명소리, 귓가에 속삭이는 바람소리까지. 비단 외부 소리뿐만 아니라 내 몸 안의 소리도 들렸다. 헐떡거리는 숨소리, 덜컹이는 가방에 맞춰 뛰는 심장소리, 입 안에 머금은 마른침이 목젖을 넘어가는 소리 같은 것들.


땀줄기가 등 곡선을 타고 흐른다. 기분 좋은 상쾌함이다. 잊고 있던 어린 기억들을 떠올린다. 집 근처 공터에서 친구들과 나뭇가지로 칼싸움을 하다 지쳐 풀잎 위에 누워 바람을 쐰 기억. 그때는 뭐가 그리 행복했는지.



계속 걷다 보니 추억을 회상하며 고조됐던 마음도 점점 가라앉았다. 한 몸 같던 배낭은 어깨를 조이고 상쾌했던 땀은 옷을 흠뻑 적셔 온몸이 축축했다.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순례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머릿속 한편에서 포기라는 단어가 살짝 고개를 내밀었고,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포기는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내 고개는 포기의 무게에 짓눌려 땅만 보였다. 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잠시였고, 좁아진 내 시야에는 순례를 하기 위해 구매한 새 트래킹화와 모래빛 자갈들, 벌레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마침 눈앞에 벤치가 보였다. 처음으로 배낭을 풀고 벤치에 몸을 뉘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시니 호흡이 돌아왔다. 기분 좋은 바람이 다시금 날 스쳐 지나갔고, 크고 작은 풀잎들과 색이 바래진 핑크뮬리가 바람에 맞춰 흔들리다 멈추는 모습을 보며 포기에 흔들리던 내 마음도 같이 멈췄다. 무작정 앞만 보고 걷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안 순간이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일어나서 몸을 털고 배낭을 짊어졌다.


천천히 걷다 보니 Alpriate에 도착했다. 리스본에서 Alpriate까지는 대략 22km이다. 첫째 날 순례는 이 마을에서 마무리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최근 마을의 숙소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에 반강제적으로 다음 마을까지 가기로 했다. 나는 마을을 벗어나기 전 물을 구매하기 위해서 카페에 들렀다. 카페에선 마을 주민 몇 명이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하고 있을 뿐 전반적으로 한적했다. 하지만 그들이 맥주를 너무 맛있게 먹기에 주문을 권하는 아주머니에게 나도 반사적으로 맥주를 주문했다.


"순례자죠? 어려 보이는데."

아주머니가 맥주를 건네며 내게 물어봤다.


"네, 이번이 첫 순례예요. 자신 있었는데 힘드네요."

"자신의 페이스가 중요해요. 젊으니까 포기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완주할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빈자리에 앉아 맥주를 마시니 피로가 풀린다. 마을 주민들은 앳된 동양인이 순례하는 것이 신기한지 나를 힐끔 쳐다본다. 꿀처럼 달콤한 맥주를 순식간에 비운 후 물을 사고 밖으로 나왔다.


"부엔 까미노!"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마을 주민들이 엄지를 치켜세워준다. 그들에게 미소로 화답하며 목적지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오늘의 목적지인 Alverca do Ribatejo까지는 10km가량 남았다.



- 지친다면 쉬어가는 게 어떨까 -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