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2 캐나다인 도나토

by Gi

정오의 햇살이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내리쬐며 세상을 눈부시게 만들었다. 도무지 끝없이 펼쳐진 녹색 바다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잠시 숨을 고르기로 했다. 젖은 땅 위로 배낭을 내려놓았다. 진흙 위에 차마 앉지는 못하고 마른 물로 목을 축이는데 걸어왔던 길 속 벤치에서 봤던 아저씨가 보인다. 그는 어느새 내 앞으로 와 인사를 건넨다.


"부엔 까미노. 참 덥네요."


그가 매고 있던 빨간 배낭이 눈에 띄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빨간 배낭. 아! 어제 그네에서 내 사진을 찍어 갔던 까미노다.


"부엔 까미노. 맞죠? 어제 그네에서 제 사진을 찍어 갔던"

"맞아요. 풍경이랑 잘 어울려서 찍었어요."

"제 이름은 건입니다. 한국인이에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도나토예요. 캐나다에서 왔어요."



캐나다인 도나토는 순례가 5번 째라고 말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우리가 걷고 있는 포르투갈 길 뿐만 아니라 프랑스 길, 북의 길, 은의 길 등 여러 가지 코스가 있다. 어쩐지 인상부터 경험의 노련함이 엿보인다.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듯한 그의 날카로운 외양 속에서 따뜻함이 새어 나왔다. 입가에 맴도는 미소는 부드럽고 온화했으며, 깊은 주름 사이로 엿보이는 눈빛은 한없이 자애로웠다.


그와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던 중 문득, 내 부족한 영어 실력이 그에게 실례가 가진 않는지 걱정이 되었다.


“알다시피 난 영어를 잘하지 못해, 영어 문법도 엉망이고.. 미안”

“전혀 문제없어. 너는 훌륭한 영어실력을 가지고 있어. 만일 부족하더라도 네가 하는 말을 내가 이해하고, 내가 하는 말을 네가 이해하는데 뭐가 문제야.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자신감이 부족한걸요."

"너의 모국어는 한국어야. 지금 우리의 대화는 제2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거고. 부족함이 느껴지는 건 네가 지금 쓰고 있는 언어가 익숙지 않기 때문이야. 만약 내가 한국어를 하면 어색할걸?"


그와 대화를 할수록 점점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영어가 그렇게 신경 쓰이면 자기와의 대화를 통해서 연습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분법으로 나눈 듯한 초록빛 밭과 푸른 하늘 사이 우리는 그곳의 풍경과 서로의 삶에 몰입해 있었다.



함께 걸으니 어느새 두 번째 마을에 도착했다. 아기자기한 마을엔 조그만 강을 바라볼 수 있는 벤치가 있었다. 휴식이 필요한 나는 그에게 잠시 쉬어가자고 권했다. 흔쾌히 수락한 그는 나와 같이 신발과 양말을 벗고 뜨거운 발을 식혔다. 아침에 비가 와서 그런지 유속이 빠르다. 강을 보며 발을 만지작 거리니 그가 내 발의 물집을 눈치챘다.


그는 자신의 배낭에서 물집 밴드를 꺼내더니 정성스럽게 내 발에 붙여주었다.

“오늘 밤에 로션을 듬뿍 바르고 자. 내일은 양말을 두 겹으로 신으면 좋을 거야.”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그에게 악의 없는 친절함을 느꼈다. 좋은 사람이다.

캐나다인 도나토



마을의 오래된 집들을 지나며, 그는 살아 있는 역사책처럼 포르투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래된 집 대문의 풍화된 벽 위의 이니셜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이니셜은 이 집의 주인의 성이야. 집이 다른 집들보다 큰 것 보니 이 마을의 부자가 살았을 확률이 크군.

이 오래된 건물들, 좁은 골목길, 그리고 주변의 넓은 농장까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야."


"포르투갈의 문학노벨상 수상자가 이 근방에서 태어난 거 알아? 사라마구라고, 그의 책을 한 번 읽어본 적 있는데 독특한 문학 세계가 인상적이었어."


"우리가 가는 목적지인 골레가는 말로 유명하지. 아마 전 유럽에서 말 애호가란 애호가는 다 모일 걸?"


마을을 벗어날 때까지 그의 이야기는 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은 나의 여행에 색다른 재미와 감동을 불어넣었다. 선물 받은 책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듯한 설렘의 기분이었다.




어느새 우리의 발걸음은 진흙에서 마른 흙을 거쳐 그리고 아스팔트 길 위로 옮겨갔다. 뜨거운 아스팔트 열기에 애써 외면했던 발의 피로가 몰려왔다. 말수가 점점 줄어드는 나를 보고 그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건, 괜찮아?"

"네... 저기 멀리 보이는 도시가 골레가인 것 같은데 걸으면 걸을수록 계속 멀어지는 것 같아요."

"원래 목표라는 게 그래. 다 온 것 같다가도 멀어지기도 하고, 실패도 하고.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다 보면 결국 도착해.

인생도 마찬가지야. 목표를 정했으면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매 순간마다 다해야 해. 하지만 그 속에서 중요한 건,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무얼 느끼느냐야. 남들보다 빠르게 도착하는 것, 더 많이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 그게 전부가 아니야.

지금 우리를 지나친 자동차는 훨씬 빠르게 골레가에 도착하겠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말이야.

그렇지만 저 차는 우리가 지금 느끼는 이 평화로움, 서로 나눴던 이야기들, 이 순간순간의 경험들을 놓치고 있어. 빨리 가는 게 전부는 아니야. 때로는 천천히 가는 게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지.

저기 보이는 갈림길을 봐. 우리의 인생도 저런 갈림길의 연속이야. 어느 길로 갈지 선택은 네 몫이지. 남들이 가는 길이 아닌 네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길을 네 속도로, 네 방식대로 가면 돼.

이제 골레가가 조금 더 가까워 보이지 않아? 얼마나 남았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아. 지금 이 순간, 이 걸음을 즐기는 것. 그게 인생을 사는 방법이야."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경쟁에 지쳐 이 길을 걷고 있는 나에겐 삶의 방향성과 나만의 리듬을 만드는 게 중요했다. 피로가 가시진 않았지만, 마음속에 작은 불씨 같은 것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아스팔트 옆 길가에 피어난 야생화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오늘의 목적지인 골레가에 도착했다. 도나토와 숙소가 달라 마지막에 헤어졌지만 산티아고를 향하는 이상 우리는 계속 볼 수 있을 거라는 그의 말에 기분이 좋았다.

골레가의 모습



절뚝거리며 오늘 묵을 호스텔에 도착했다. 나를 반겨준 건 인상 좋은 아저씨와 덩치 큰 개들의 환영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돌로 포장된 아늑한 마당이 펼쳐졌다. 담쟁이덩굴이 담장벽을 타고 올라가 있고, 구석에는 오래된 창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큰 나무가 만들어 주는 그늘은 무척 시원해 보였다. 안내받은 내 침대에 짐을 풀고 평소처럼 샤워를 마친 뒤 빨래를 했다.

숙소


그 후 마켓에서 간단히 저녁을 사서 돌아와 마당 한편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먹었다. 개들이 꼬리를 흔들며 내게 다가와 애교를 부린다. 먹던 닭다리를 아저씨 몰래 주니 개들은 그 후부터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새 하늘이 붉은빛으로 물들어간다. 노을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색채가 마을을 감싸며, 멀리서 은은하게 교회 종소리가 들려왔다. 개들을 쓰다듬으며, 나도 언젠가 이런 아늑한 집에서 평화로운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경험했던 동화 같은 이야기들을 일기장에 상세히 기록하며 나의 하루가 조용히 마무리 됐다.

동영상을 못올리나?



오늘 하루 32.61KM를 걸었다.



- 비교하지 않기. 매 순간 최선을 다하기. 이 순간을 즐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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