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1 강아지 가이드

by Gi

창문 사이로 새어 나온 아침 빛이 이불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나는 그 따스함을 뒤로하고 일어나 밖에 널어둔 빨래를 거두었다. 아쉽게도 빨래는 아직 덜 마른 듯했다. 간단히 세수를 마치고 배낭을 챙기는 동안, 같은 방을 쓴 두 남성도 잠에서 깨어났다. 그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서는데, 부엌 공용식탁 위에 숙소 주인이 미리 준비해 둔 아침 식사 꾸러미가 눈에 들어왔다. 마음속으로 감사 인사를 보내며 식사를 챙긴 뒤 길을 나섰다.


“오늘도 힘내보자.”



이른 아침의 쌀쌀한 기운이 피부를 스쳤다. 독특한 말 문화로 유명한 골레가 마을을 벗어나자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이 끝없이 펼쳐졌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반려견과 산책 나온 주민들이 보였다. 무뚝뚝해 보이는 그들에게 용기 내어 인사를 건네자, 예상외로 환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받아주었다.


" Bom dia."


한국에서는 낯선 이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 어려웠는데,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이 길을 통해 깨달은 것은 따뜻한 인사 한마디가 하루를 긍정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이었다.



상쾌한 새벽 공기를 폐 깊숙이 들이마시며 손에 쥔 봉투 안 아침 식사를 확인했다. 빵과 쿠키, 서양배, 그리고 우유. 소박하지만 완벽한 조화였다. 처음 맛보는 서양배를 한입 베어 물자 달콤한 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놀라움에 눈이 동그래지며 연신 “맛있다”를 외치는 나를, 지나가던 한 아저씨가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전날 밤 도나토가 추천해 준 대로 물집이 잡힌 발에 바셀린을 듬뿍 바르고 양말을 두 겹 신으니 발이 한결 가벼웠다. 날아갈 듯 경쾌하게 걷고 있는데 누군가 뒤를 따라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뒤돌아보니 한 마리의 리트리버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녀석은 내게 다가와 붙더니 함께 걷기 시작했다.



혹시 배가 고파 따라오는 건가 싶어 빵을 건네자, 녀석은 받아 물고는 땅을 파 숨겼다. 그리고는 마치 뱃삯을 받은 사공처럼 내 앞에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강아지 가이드’와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빵을 건네줬다


앞서가는 파트라슈


녀석의 안내를 받아 어느 작은 마을에 도착하자, 마당에서 빨래를 널던 아주머니가 강아지의 이름이 파트라슈라고 알려주었다. “아, 넌 유명인사였구나.” 파트라슈와 함께 걸으니 마치 내가 네로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똑똑한 녀석은 갈림길에서는 앞장서서 나를 안내했고, 어떤 길에서는 뒤에서 따라오며 자신이 숨겨둔 음식이 잘 있나 확인하거나 또 어떤 길에선 황금빛 들판에 떠오르는 해를 아련하게 바라보곤 했다.




힘든 줄도 모르고 7km가량을 파트라슈와 함께 걸어 큰 마을에 도착했다. 휴식을 취하며 배낭 속 바나나를 꺼내 파트라슈에게 주려 벤치를 찾았다. 그런데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녀석은 무심하게, 인사도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혹시 다른 길 잃은 여행자를 돕기 위해서일까?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그의 안내 덕분에 이 여정은 더욱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과 어긋나며 마을 중심부에 도착했다. 적당한 벤치를 발견하고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파트라슈에게 주지 못한 바나나를 먹으며 이마를 스치는 바람을 느꼈다. 마을이, 그리고 길이 참 조용했다. 그 고요함이 좋았다. 뜨거운 태양이 나를 괴롭히기 전, 이 적막한 길의 온도를 사랑하게 되었다.


한참을 쉬고 있자니, 내가 지나온 길에서 배낭을 짊어진 세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같은 숙소를 쓴 사람들과 도나토 아저씨였다. 반가운 마음에 남은 바나나를 서둘러 먹고 배낭을 메었다. 그들과 함께 걸으며 방금 전 겪은 놀라운 경험을 이야기하는 내 모습에서 행복을 느꼈다.



나는 삶에서 느끼는 행복의 총량은 모든 인간이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행복은 모든 감정의 근원이며, 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객관적인 요소도 물론 존재하겠지만 발현되는 방식들은 개인마다 살아온 환경과 가치관이 다르기에 주관적인 요소가 크다.


물질적 풍요에서 오는 안정감, 목표 달성의 성취감, 깊은 우정이 주는 따뜻함, 존경, 사랑, 때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순간들에서 오는 행복, 극단적으로는 타인을 해치며 행복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본능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물론 윤리적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인간 본성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예시니까


하지만 정말 불행한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행복해지는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형태의 행복이 존재해 명확한 답은 없다. 나 역시 그랬다. 항상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회적 기준이나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다 보니 내 진정한 자아와 행복을 잃어버렸다.


남들과 비교하며 느끼는 질투, 분노, 나태 같은 감정들에 시간을 허비했다. 부정적 감정들이 행복의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것을 지양해야 했다. 행복의 총량을 낭비하지 말았어야 했다. 누구보다 사소한 것에서 더 많이 행복해야 했다.


내가 지금 이 길 위에 있는 이유는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스스로 알기 위해서다. 사실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은 똑같은 바람, 똑같은 온도, 똑같은 길 위의 똑같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지금 느끼는 감정은 왜 행복일까? 평소에는 왜 행복하지 않고 스스로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을까? 모든 것은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욕심을 버리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내면을 들여다보며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대화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이제 그 대화의 시작점에 서 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큰 원형 로터리에 도착했고, 항상 같은 방향으로만 가리키던 파란색 화살표와, 노란색 화살표가 나뉘었다. 파란색 화살표는 파티마. 노란색 화살표는 산티아고로 향한다. 모두가 산티아고 방향으로 갈 줄 알았지만, 나와 도나토를 제외한 두 명은 파티마를 들렀다 산티아고로 향한다고 했다. 목적지는 같지만 방향이 달랐다. 그들과 포옹하며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파티마는 현대 가톨릭 신앙의 중요한 장소로,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20세기 역사와 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 곳이다.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매월 13일, 세 명의 어린 목동(루치아, 프란치스코, 히아친타)에게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고 전해진 이후 파티마는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고, 발현 장소에 대성당과 여러 종교 시설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순례 이후 동유럽 여행이 계획되어 있어서 시간을 많이 쓸 수 없는 상황이라 파티마는 들리지 못하고 바로 산티아고로 향한다.)




도나토와 발을 맞춰 걸으며 그의 조언대로 전날 밤 바셀린을 듬뿍 바르고 양말을 두 겹 신었더니 한결 낫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도나토가 웃는다.



도나토와 함께 걸으며 그의 특유의 표정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기분 좋을 때는 눈가에 주름이 세 개쯤 생기고 앞니가 다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무언가를 설명할 때는 미간에 주름이 졌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압도될 때면 입을 살짝 벌린 채 말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의 기분 좋은 표정은 그를 칭찬했을 때 주로 나온다. 방금 아저씨의 조언을 칭찬했을 때 눈가에 주름이 세 개가 잡혔다.



열중하는 표정은 그가 무언가 설명해 줄 때 볼 수 있다. 그와 걷다 보니 어느새 엄청난 경사를 지닌 큰 숲길이 나왔는데, 그는 이 나무가 유칼립투스 나무라며 이 숲 모든 나무가 유칼립투스 나무로 이루어진 숲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곤 작은 나무에 다가가 잎을 딴 후 비비며 내게 냄새를 맡아보라고 했다. 상쾌한 솔 향과 함께 어딘가 민트향 비슷한 향이 났다. 그는 유칼립투스 어린잎은 벌레를 쫓는 효능이 있다며 배낭과 침낭에 넣어두면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의 미간은 주름이 졌다. 재밌는 건, 그에게 모른 사실을 알아서 기분이 좋다며 감사를 전하면 그의 미간의 주름이 눈가의 주름으로 변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자연에 압도되었을 때 표정이다. 숲길은 경사가 상당히 심해 네발로 기어가듯이 올라가야 했다. 옷이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었고, 배낭이 어깨를 죄였다. 하지만 힘듦을 딛고 정상에 오르고 봤던 어린 유칼립투스 밭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상쾌한 바람이 어린 솔 향을 머금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 풍경에 압도되어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 옆을 봤더니 아저씨도 나와 같은 듯 입을 살짝 벌리며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와 같은 표정이었을까.



우리는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앉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니 큰 바위에 걸터앉아 쉬는 여성 2명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쳐서 인사했더니 그녀들은 나를 아는 눈치다. 알고 보니 산타렝에서 숙소 체크인을 할 때 각자 손주 자랑을 늘어놨던 여성들이다. 그녀들은 내 발은 이제 괜찮냐며 걱정해 줬고, 나는 옆에 있는 도나토의 도움으로 이제 멀쩡하다며 강한 척을 했다. 아저씨의 눈가에 주름이 3개가 생겼다.



이야기하면서 쉬니 시간은 금방 흐른다. 그녀들과 또 한 번의 작별 인사를 하고 아저씨와 길을 나섰다. 오르막 길에 비해 내리막은 완만했다. 구불구불한 내리막을 따라 숲 길을 벗어나니 고속도로처럼 보이는 길이 나왔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도정도 되려나. 쌩쌩 지나가는 차들 옆으로 긴 직진 코스를 걷는다. 숲 속에서 느낀 상쾌한 기분은 어디 갔는지 남아 있는 건 시끄러운 경적 소리와 불쾌한 자동차 냄새다. 이 구간을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빠르게 옮긴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습관을 기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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