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的)인 것은 객관이 아니다, 과학적(的) 실상

객관적的 일 하는 최고봉 인공지능, 챗GPT

by 강하단

“당신 노래는 듣기 불편합니다”라고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노래 못한다고 직접 얘기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넌 잘하니 라고 반박하면서 평가한 사람이 싫어진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당신의 노래실력은 낙제점수입니다”라고 하면 기분이 여전히 좋지는 않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대놓고 싫어하기 어려워진다. 왜 일까 살펴보니, 앞과는 달리 뒤의 말에는 ‘객관적으로’라는 말이 들어가 있음을 발견한다.


’객관적’에 비해 의외로 잘 쓰지 않는 단어가 ‘객관’이란 단어다. 객관적인 평가, 객관적인 시각, 객관적 사실 등의 예와 같이 객관적이라는 말은 일상에서도 무의식 중에 자주 사용한다. 대신 객관이란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나 곰곰이 생각해봐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객관의 ‘객’은 손님 또는 대상이고, ‘관’은 본다라는 뜻이므로 객관은 바라본 대상이란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대상을 바라보는 주어가 있으니 주인인 주관이다. 객관을 말하는 순간 동시에 주관이 드러난다. 주객이 짝을 지어 존재한다. 그래서 일까 말하는 순간 드러나기 때문에 책임지기 싫을 때 객관적이란 말을 흔히 사용하는듯 보인다. 객관적은 객관이 아니라서 주관을 밝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적的”이란 자신의 주관이 실제로 한 것이 아니라 책임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객관적이란 말은 어쩌면 무책임하고 비겁한 주관이 숨기 위한 교묘한 단어 표현인듯 하다.


객관적으로 하는 행위는 제 3자가 되어 행해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주체가 없는 행위란 실상이 없다. 주체의 주관이 당연히 행하면서도 행위자는 행위 뒤에 숨으려는 의도를 가졌기에 비겁하다. 그리고 객관적이란 말을 하는 순간 공정하게 한다고 들릴 수 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자신을 배제하고 또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할 수 있는 평가, 결정, 판단은 사실 없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공정해 지기까지 하니 객관적이란 단어를 누가 사용하지 않겠는가.


객관이란 단어는 이제 사용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마치 “객관적”이란 말을 쓰기 위해 객관이란 단어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객관’이란 단어가 들어간 표현이 여전히 떠오르지 않는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이제 객관적으로만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판할 때는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다고 보면 그럴 수 있고 칭찬할 때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공정하게 판단했다는 뜻을 가질 수 있으니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곳이 있는데 바로 과학분야이다.


과학자 마저 어떤 현상에 대한 연구를 할 때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최소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아무리 첨단장비로 측정해 정확한 데이터를 얻었다 하더라도 장비를 선택한 것도, 최종 판단을 하는 것은 해당 실험을 한 과학자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현상을 측정하는 기기가 데이터를 주었다 하더라도 그 현상과 측정된 데이터를 연결해서 판단을 하는 것은 과학자다. 판단의 결과를 첨단 측정장비가 제공한 데이터, 즉,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객관적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한다면 과학자는 객관적이란 단어 뒤에서 과학자임을 스스로 부인하는 행위다. 이는 과학자 자신이 만든 과학연구작품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오로지 데이터에 근거해 객관적으로 판단한 그 누군가로 자신을 감추는 행위다. 자신이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연구를 “주관”하지 않았으니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연구결과에 대한 소유권, 권한은 온전히 주장하니 “객관적”으로 볼 때 이율배반”적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부이긴 하지만 과학자 중에서는 과학논문에서도 수동태보다는 능동태 사용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과학자의 관점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과학논문은 수동태를 사용하기는 한다.


과학자가 문제현상에 대한 데이터를 근거로 객관적 사실이라고 주장할 때 한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해당 현상이 가질 수 있는 데이터를 모두 고려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과학자는 그 중 자신이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데이터를 선택한 것이다. 이는 일부 데이터를 버려 결과를 조작했다는 뜻이 아니라 연구대상인 특정 현상의 실험조건이 데이터를 만들었다면 다른 조건에서는 다른 데이터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데이터를 버리지는 않았지만 모든 조건을 고려하지는 못하므로 당연히 선택된 데이터라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의 주체는 누구도 아닌 과학자 자신이다. 그러므로 연구결과가 객관적 근거와 사실이라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모든 조건을 고려해서 실험할 수는 없다.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니 연구의 실험조건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 누구도 아닌 과학자 자신이 선택했다. 자신의 선택으로 나온 데이터는 바로 그 이유로 과학자의 분신이라고 해야하는데 그 결과를 객관적 근거와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연구결과 데이터는 과학자의 그냥 온전한 객관이어야 한다. 이를 객관적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과학자가 자신의 논문에 실험조건을 충분히 설명하고 밝혔다고 말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인 근거와 사실이라고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충분히 설명하고 밝힌 실험조건을 그 누구도 아닌 과학자가 선택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선택한 주체는 그렇게 말한 바로 그 과학자다. 과학자의 연구결과는 과학자 자신의 분신인 객관이어야지 객관적이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면서 과학자가 한발 뺀다면 인공지능 시대 가장 먼저 도태될 직업은 다름 아니라 과학자일 것이다. 자명하다. 과학자 자신이 밝힌 수많은 연구실험 조건 중 가장 적합하다고 하나를 택하는 행위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공지능이고 인공지능이야말로 책임질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백신접종 후 부작용으로 사망한 사람에게 객관적 이론과 사실에 근거해 연구되고 임상실험된 백신이었다는 말은 결코 위로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과학도 아니다. 이는 코로나 팬데믹의 전지구적인 극복에 백신이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부작용이 생겼다면 이를 연구한 과학자와 제약사, 임상실험한 임상연구자, 해당 백신을 승인한 기관의 책임있는 인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백신은 과학자, 제약회사, 임상연구자, 기관이 선택한 방법이지 객관적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작용이 예상되는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고 선택해서 실험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안이 급해 그렇게 선택했을 뿐 객관적 사실과 과학적인 방법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 하겠지만 이는 객관적, 과학적 이라는 말 뒤에 숨는 비겁한 행위라는 것에는 변함없다. 챗GPT보다 부실한 대답을 과학적이라고 우기는 과학자가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은가. 코로나 유전자 기반 백신 중 하나를 개발한 미국 한 제약회사의 백신개발팀에 있었던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인공지능에 의한 신약개발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바뀔 거야. 그리고 그곳으로 분명히 지금 가고 있어”


과학결과는 과학자와 다름없다. 과학적인 과학은 과학이 아니고 과학적일 뿐이다. 객관적인 것은 결코 객관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정치가는 책임있는 정치를 해야지 정치적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정치를 행하고 그에 해당되는 책임을 져야 한다. 교육자는 사명감을 갖고 교육을 행해야지 교육적 행위를 하고는 교육자 행세를 해서는 안된다. 정치적 정치인, 교육적 교육자는 부모가 자식에게 부모적인 존재가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책임없는 비겁한 행위이고 사실 그런 존재가 있어서는 안된다.


그럼 이제 다른 질문을 생각해 보자. “기후재앙 원인은 과학인가 과학적인가? 과학자의 객관인가 또는 과학자의 객관적 견해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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