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과학으로 나눠진 환경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 낭만주의 대 과학기술 녹색주의

by 강하단

산 허리가 반토막 날 정도로 파헤쳐진 모습을 보면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 대규모 개발 소식에 설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오늘은 그런 얘기가 아니라 잘려나간 산을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하고 싶다. 오래 전에도 비슷했다. 그들도 훼손된 국토의 모습에 안타까워 했지만 극복하려는 그들의 선택은 달랐다. 자연을 이해하는 시인의 마음과 과학 정신으로 나뉘었다. 1차 산업혁명 개발의 물결이 거셀 때 망가진 국토를 바라보는 뚜렷이 다른 두개의 시선은 지금 시대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18세기 영국을 강타한 산업혁명은 풍요의 시대를 열었다. 철학의 사상으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개인이 올곧게 설 수 있는 세상을 본격적으로 열었다. 풍요를 가져온 변화에 부작용이 없을 수 없다. 산과 들을 가로 지르는 철도, 자고 일어나면 초원은 공장으로 변했을 것이다. 뒤는 차치하고 옆 조차 살펴볼 틈 없이 앞으로만 치고 나가는 산업혁명 주도 세력을 넋 놓고 바라보던 사람들은 고민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뭐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삶의 터가 사라지고 하루가 다르게 부의 세력이 생겨났는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당신이 만약 산업혁명 시대 자연을 사랑한 사람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까? 당황하고 맥없이 받아들이면서 당하기만 하던 때가 지나 화가 나기 시작할 때 어떻게 대처했겠는가? 그 시대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첫번째 흐름은 무차별적으로 진행되는 산업혁명의 개발을 멈추길 주장하고 이렇게 가다가는 공멸한다는 우려 속에서 원래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산업혁명 여파로 상처입은 국토를 걸으며 시를 짓고 또 지어 발표했다. 자신의 아름다운 시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길 바랬다.


산업혁명으로 상처입은 국토를 치유하려는 두번째 흐름은 독일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윌리엄 워즈워스의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함께 할 수는 없었다. 낭만적 감상에 빠져 있으면 무엇으로 회복할 수 있겠냐고 비판하면서 그런 식으로는 한번 훼손된 국토를 원상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대신 과학기술의 힘으로 국토를 치유하자 결심한다. 국토를 하나의 살아있는 정령으로 까지 보고 애국주의가 유독 강한 나라로 알려져 있으니 이해가 된다. 대학에 산림학과 전공을 만드는 등 과학에 온 힘을 쏟게 된다. 젊은 링컨이 독일로 산림학을 공부하러 유학 올 정도였다.


물론 영국에서도 윌리엄 워즈워스에서 그치지 않았다. 존 러스킨과 같은 사상가들이 산업혁명으로 인한 산업화의 영향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이론화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인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무자비한 개발을 진행하는 영국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비판을 이어갔던 것이다.


영국의 환경주의는 산업혁명 이전 자연을 모범으로 하면서 개발이 정말 꼭 필요한 것인지 고민하면서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을 제안했기에 국가의 정책에 반대편에 서는 경우가 많다. 반대가 정체성의 특징이 되기도 한다. 이런 영국의 환경주의는 지금의 활동가 및 환경단체 중심 움직임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는 비판은 말장난이다. 활동가 중심의 환경주의가 개발과 자연의 보이지 않는 선을 유지하는 유일한 마지노선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반면 과학기술 정책을 기치로 진행된 독일의 환경주의는 국가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의 정부 중심 환경정책의 기조를 마련해 주었다.


현재 정부가 실현하려는 환경정책과 전지구적 기후재앙 극복 유엔 중심의 노력을 보면 산업혁명 시대 이후 생겨난 환경주의 흐름은 독일의 과학기술 중심 방향이 승리한듯 보인다. 환경단체와 활동가들의 활동도 정부와 정부간 협의체인 UN의 정책을 향한 목소리인 것을 보면 영국의 낭만주의 환경주의가 독일의 과학기술 환경주의에 무릎 꿇은 듯 보인다.


18세기 말 독일 환경주의, 즉, 국가를 대표해 운영하는 정부 중심으로 과학기술 정책을 마련하여 환경을 지키고 되 살린다는 환경주의는 이제 거의 유일한 대항없는 주류가 된듯 보인다. 일상에서 출발해 자연의 큰 흐름으로 이어갔던 낭만주의 환경주의와는 달리 과학기술 환경주의는 정책으로 출발한다. 강력한 추진력은 있지만 정책이 일상으로 다시 복귀할 때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는 단점을 가진다. 강력하게 추진하는 힘을 가진 대신 일상에서는 다소 떨어진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예를 들어보면, 탄소중립, 탄소감축이라는 정책에는 백분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지만 일상에서 도대체 어떻게 탄소중립 실천이 가능하단 말인가. 태양광과 풍력 중심의 재생에너지와 소위 “친환경” 원전으로 탄소배출을 감축하고 탄소중립을 이룬다고 하면 좋다고 찬성할 수 있지만 그게 어떻게 개인의 일상으로 연결된단 말인가. 일상으로 이어지지 못해 개인이 피부로 체감하지 못한다면 정책은 정책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적 묘수로써 이런 환경주의 정책들이 악용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과거 유럽에서 가장 환경주의 정책이 강했던 시기가 독일 나치당 정권 때였다는 것을 우린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유기농 농법을 정책에 반영하기 까지 했었다.


낭만주의 환경주의를 주류로 이끌자는 그야말로 낭만적인 주장만 해서는 안된다. 일상의 실천과는 거리가 먼 과학기술 정책 환경주의에 안주해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이것은 안된다, 저것도 안된다 식으로 비판만 해서도 안된다. 이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세계도 여러 차례 바꿨고 세상도 한 차례 크게 바뀌었다. 그런데 언제쩍 환경주의에만 메달릴 것인가. 우선 작은 고민의 실천을 제안해 본다. 디지털시대 환경이란 개념은 술이란 이름만 유지할뿐 엄연한 새로운 술이다. 환경이란 단어만 유지될 뿐 전혀 다른 개념과 사회적 맥락을 가지게 되었다. 어떤 그릇에 담아야 함도 자명하다. 디지털 기술, 디지털 윤리, 디지털 정신과 철학 속에 담아야 한다. 풀어야 할 문제의 카다고리 부터 이렇게 줄였으면 한다. 그 속에 전 시대의 유산과 정신이 자연스럽게 담기는 것은 당연히 환영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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