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망하면 하루도 버티기 힘든 시대
기성 언론과 방송이 유튜브를 비판하면 할 수록 하루 아침에 망한 집안의 궁색한 푸념 처럼 들린다. 유튜브도 물론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유튜브에 문제가 있다고 거대한 언론 성벽을 쌓고는 보고 들을 것을 가르치듯 강요했던 신문과 방송으로 대중이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정말 기대하는지 보기 참 안쓰럽다. 한 방송에 출연해 듣고 보고 싶은 것만 제공하는 유튜브를 비판하는 언론사 논설위원에게 대중은 “봐야 할 세상이 있다고 당신은 여전히 가르치려 드는군요”라고 반박한다. 대중의 모습이 나에게는 그렇게 보인다. 막말로 보고 싶은 것만 봐서 잘못되나 권력형 언론이 봐야 한다고 해서 본 세상 때문에 잘못되나 잘못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기왕이면 보고 싶은 것 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유튜브도 마찬가지로 가르치려 든다고 궁색한 마지막 공격을 하는 기존 권력형 방송과 언론에게 대중은 “그럼 당신도 은근히 속이듯 의도를 숨기는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하지 그랬어요”라고 하면서 마지막 남았던 채널 통로까지 차단해 버린다. 유튜브의 대세 흐름은 어리고 젊은 세대에서만 확인되지 않는다. 길거리를 가다보면 유튜브를 틀고 들으며 홀로 산책하는 어르신 세대를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기존 언론과 방송에는 데스크desk라는 것이 있다. 데스크는 큰 탁자라는 뜻인데 사회에 진실을 전달하는 펜의 힘은 어쩔 수 없이 데스크 권력을 필요로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언론에만 데스크가 있는게 아니다. 학문의 자유로운 토론이 이루어지는 저널에도 데스크가 있다. 논문이 투고되면 데스크에서 대부분 걸려지니 권력이 아니라고 하기 힘들다. 데스크를 일차 통과해도 평가하는 리뷰어도 바로 그 데스크에서 결정된다. 이렇듯 데스크는 진실을 가려내는 예리한 펜촉을 상징하지만 또한 그로 인해 권력에 물들기 쉬운 곳이기도 하다. 유튜브에는 데스크가 없다. 다수의 작은 클릭이 모여 데스크 역할을 대신 한다. 데스크는 중앙이고 클릭하는 개인은 어디에나 있으니 중앙집중형 권력과 분산된 힘의 형태로 대변된다고 할 수 있다. 중심 점에 힘이 있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데스크형 언론이었다면 흩어져 먼지같은 존재들이 힘을 모으는 것이 유튜브 방송 모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