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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단 Oct 07. 2022

‘늑대사냥’, 피로 통역한 세계

괴물이 되어야만 자신을 지키는 존재

김홍선감독은 인터뷰에서 영화 ‘늑대사냥’에서 날것들을 그려보고 싶다고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서 난무하는 온갖 말, 행동, 법의 끝에 칼을 몰래 꽂아두면 이 세상은 영화 ‘늑대사냥’과 다르지 않다고 김홍선감독은 말하고 있었다.


괴물이 괴물인지, 인간이 괴물보다 더한 괴물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유전자조작변형으로 만들어진 인조 괴물, 사회가 만든 범죄자 괴물, 권력 조직의 허락받은 분노가 만든 괴물을 두고 잔혹함의 우위를 가리기는 불가능했다. 한가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권력조직이 만든 분노란 괴물이 가장 허약했다. 죽어가면서 괴물에 상처낸 것으로 복수했다고 위안하는 찌질함까지 보였다. 침착하게 목숨을 거두는 인조괴물은 일본제국주의의 희생자, 증오가 삶의 목적이 된 사회가 만든 범죄자, 싸구려 권력의 폭력은 영화를 빨간색으로 채우기 충분했다. 그곳에 행동의 이유는 무의미하다. 생존을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극한적 동물적 생존본능이 우리 사회의 유일한 작동코드라고 영화는 피로 통역한다. ‘늑대사냥’은 말한다. 인간성은 애당초 없는 사물이며 생존을 위한 날선 칼과 자신을 지킬 힘만이 필요하다고. 막힌 공간 배라는 이름의 세계는 바로 우리의 현실이었다.


보기 힘든 잔혹함을 모두 CG라고 믿으면 겨우 볼 수 있다. 견디다 보면 한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영화의 무대인 배 안에 선량한 시민은 없다는 거다. 물론 범죄자 죄수라고 해서 괴물에게 희생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영화에서는, 경찰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죄수들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어 그들이 죄값을 받는 것이라 말하는듯 했다.


한가지 반전이 생긴다. 김홍선감독도, 어떤 영화평론에서도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영화의 끝 장면에서 그렇게 느껴졌다. ‘늑대사냥’에서 괴물이 된 한 인간, 일제시대 끌려가 생체실험으로 기억을 잃고 오로지 살인병기로 변한 인간이 어쩌면 가장 선량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역사, 시대, 사회, 과학기술로부터 버림받고 처절하게 이용만 당한 선량한 시민의 얼굴이 괴물에 투영된다. 괴물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을 지킬 수 있기에 그가 ‘늑대사냥’ 배 안의 유일한 선량한 시민이었다고 말해 주고 싶다. 그만이 자신의 의지로 괴물이 되지 않은 유일한 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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