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 드레스 코드
울산에서 KTX를 타고 서울역에 내리면 도착한 승객들은 플랫폼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을 가득 메운다. 다른 계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특히 겨울철이면 플랫폼에서 바라본 풍경은 온통 검다. 마치 한국 사람은 검은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 것 마냥 거의 모든 사람이 검은 옷을 입고 있다. 그야말로 검은 물결이다. 그 누구도 KTX 여행의 드레스 코드를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요 받지 않은 엄격한 드레스 코드가 한국에는 존재하는듯 하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까지 검은 색 옷을 좋아했던가 생각해 본다. 오래 전에는 백의민족이었고 암울한 군부독재 시절에도 형형색색의 밝은 빛으로 물이라도 들일 기세로 대학가는 밝았는데 언젠가부터 대학가는 물론이고 도시 번화가, 여행객 복장 등 이제는 검은 물결이 한국을 온통 뒤덮고 있다. 예전 같으면, 기억이 옳다면, 검은 옷은 예술가들의 전유물이었던 적도 있었다. 20세기 초 전체주의 물결도 이랬었냐는 생각까지 미치게 되면 공포심마저 든다. 전체성이 전체주의와는 근본부터 다르다는 것은 알지만 그 정도의 생각까지 든다. 이제 마치 한국의 교복, 유니폼 같다. 우스개 소리로 예술가들이 높은 미적 감각으로 대중의 옷을 검게 물들여버린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다. 물론 검은 옷을 입는게 잘못 되었다든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울역 플랫폼을 가득 메운 검은 색 행렬을 볼 때면, 이를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검은 색 아닌 조금은 밝고 채도가 높은 색을 입고 싶은 욕망이 생길 수도 있겠다 싶다.
검은 색 군중 속에서 튀어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냐고 누군가는 항변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검은 색 행렬을 이룬 군중의 모습이 “전체”로서 얼마나 튀어 보이는지 생각하면 숨 막히기도 하다. 또는 의도치 않게, 전혀 의식하지 않았지만 검은 색 옷을 입어야 하는 사회 질서 같은 것에 편승한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도 있다. “왜지? 내가 왜 어느새 검은 색 옷을 입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