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풋내기의 영암 정착기

3) 심심할 땐? 시골 한의원

by 강하늘땅


“근데 선생님. 이거 원래 이렇게 뜨거운 거예요?”

“네~”

“아... 근데 타는 것 같이 뜨거우면 어떻게 해요?”

“그럼 떼어달라고 말해야지요?”

“뜨거워요오옷!!!”

“하하하-”


아침 7시, 잠에서 덜 깬 한 처자의 쇳소리에 온 한의원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쑥뜸이 처음이었던 서울 풋내기의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붉게 부풀어 올랐다. 잠시 후, 커튼이 착-하고 열리더니, 간호사가 능수능란한 솜씨로 쑥뜸을 오른 무릎에서 떼어냈다.


갑자기 왜 한의원이냐고?


영암에 내려 온 이후로 산책에 빠져있었기, 아니 미쳐 있었기 때문이다. 3시간을 내리 걸어도 끝나지 않는 벚꽃 길. 월출산 끝자락에 펼쳐진 유채꽃 밭. 모내기가 막 시작된 논. 노란 금계국으로 가득한 영산강 하굿둑. 시시각각 변하는 영암의 풍경을 단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나는, 틈 만나면 밖으로 나갔다. 결국, 오른 쪽 무릎이 이상 신호를 보내왔다. 어기적어기적 볼썽 사납게 걸어 다니는 나를 본 직장 동료가 터미널 옆 한의원이 있다며 가보라고 했다.


아침 일찍 문을 여는 한의원이라 출근 전에 얼른 다녀오기로 했다. 새벽안개 위로 떠오르는 해를 뒤로 한 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한의원은 이미 어르신들로 가득했다. 의사도 접수하는 직원도 출근하지 않았지만, 다들 익숙한 듯 대기실 안마의자에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입구에 서서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젊은이가 딱해보였는지, 어떤 할머니께서 접수대에 놓인 화이트보드에 이름을 적어야 한다고 알려 주셨다. 내 이름 위에는 꼬불꼬불하게 적힌 이름들이 열 개나 있었다. 6시 30분이었다. 7시까지 무얼 하며 기다리나 싶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시골 사랑방은 얼마 후 치러질 대선으로 떠들썩했다. 후진 없는 할아버지들의 화끈한 대화가 오고갔다. 그 중 혼자만 정치색이 달랐던 할아버지가 계속 수세에 몰렸다. 흥미진진하게 싸움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진료 시간이 됐다. 치료실 맨 끝 침대에 누워 치료를 기다리는데, 커튼 너머로 아까 그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장 선생은 어느 쪽이여?”

“아이 아부지는 뭘 또 그런걸 물어~

“파랑이여, 빨강이여~?”

“아. 당.연.히!!!! 비밀이지~”


한의원 경력 18년차 젊은 의사의 답변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집요한 할아버지의 질문을 천역덕스럽게 피해간 의사는 치료실을 누비며 원맨쇼를 이어갔다. 자기 차례가 밀렸다고 투덜대는 어머니를 “아 미안해~ 근데 이름 부를 때 없었잖아요~” 반존대 애교로 곧잘 달래고는, 남편 때문에 성이 난 할머니께는 “그래도 살아 있는 게 낫지 않아?” 냉철하게 말하기도 했다가, 요즘 잠이 통 안 온다고 하소연 하는 할아버지께는 “여서 잠을 하도 자니까 집에서 잠이 안 오지~ 코 좀 그만 골으라니께”하고 놀리는 그의 입담에 광대가 아려왔다.


“학생인데 벌써 여기를 왔어? 근데 영암에 뭐 놀게 있어요?”


나는 홀린 듯이 그동안의 영암 생활을 구구절절 말했다. 그 틈에 장 선생님은 오른 무릎 이곳저곳을 눌러보더니, 내 새끼손가락만한 약침을 꺼내왔다. 장 선생님은 아픈 무릎뿐 아니라, 허벅지, 정강이, 엄지발가락까지 침을 꽂았다. 탁탁 살을 침으로 쏘아댈 때마다 뜨끔뜨끔했다. 침 사이사이에는 연기가 풀풀 피어오르는 쑥뜸을 몇 개 얹었다. 그을린 쑥 향이 치료실 내부를 맴돌았다. 달궈진 작은 돌멩이가 뼈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다른 환자분들이 간호사에게 뜨겁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그냥 가벼운 투정인 줄로만 알았다.


“아따, 기운도 좋다- 뜨거운데 그냥 참았어요?”


의사 선생님은 뜨거운 쑥뜸을 곧이곧대로 참아낸 바보를 가볍게 타박하고는 내일은 예약하고 오라고 했다. 바로 예약이 되는 건 아니었고, 저녁부터 예약 접수가 가능하다고 했다. 다시 오픈 런은 하기 싫어서, 퇴근하자마자 한의원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한의원 문이 잠겨 있었다. 혹시나 하고 유리창 너머로 한의원 안을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탁탁 소리가 들렸다. 한의원 문고리에 대롱대롱 걸려 있는 화이트보드가 내는 소리였다. 가까이 다가가 판을 뒤집어 보니 삐뚤빼뚤한 검정색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최명호, 김말자. 윤명희... 아침에 봤던 바로 그 접수 판이었다. 설마 이렇게 예약을 하는 건가? 한의원 밖에 판을 걸어두면 환자들이 알아서 이름을 적고 가는 게 시골 한의원식 예약 방법이었다. 누가 지우고 자기 이름을 먼저 쓰면 어떡하려고.

순간, “아이 어무니 새치기하면 안 되지~?”하는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풉- 웃음이 나왔다. 보드마카로 내 이름을 적었다. 다섯 번째 순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