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라졌다고 느끼는 순간은 대개 극적인 사건 뒤에 오지 않는다. 큰 다툼도 없고, 결정적인 배신도 없다. 오히려 아무 일도 없는 상태에서 조용히 찾아온다.
관계는 유지되고 있고, 일상은 흘러가고 있고, 겉보기에는 문제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감각이 스친다.
내가 없어도이 관계는 잘 굴러가겠구나. 이 감각은 외로움과 다르다. 소외와도 다르다.
그것은 대체 가능해졌다는 인식이다.
그동안 내가 했던 말, 내가 움직이던 이유, 내가 조율하던 순간들. 그 모든 것이 ‘나’라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이 그제야 보인다. 이때 사람은 관계를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을 의심한다. 내가 예민한 건가,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 건가, 원래 관계라는 게 이런 건가. 그러나 사라짐은 자기 의심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 이전에 이미 사람은 여러 번 자신을 접어 두었기 때문이다. 말하고 싶었던 것을 말하지 않았고, 거절하고 싶었던 것을 설명으로 대신했고, 쉬고 싶었던 것을 역할로 덮었다.
이 작은 접힘들이 쌓여 어느 순간사람의 윤곽이 흐려진다. 그래서 사라짐은 사건이 아니라 누적의 결과다.
사라졌다는 인식이 오는 순간, 사람은 두 갈래 앞에 선다. 이제라도 다시 자리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이 상태를 정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두 번째를 선택한다. 관계가 유지되고 있으니까, 문제가 터진 건 아니니까, 지금까지도 이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러나 이 선택은 안정이 아니다.
그것은 사라짐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익숙해진 사라짐은 더 이상 아프지 않다. 대신 감각이 둔해진다. 그리고 감각이 둔해진 상태에서는 자기 자신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알아차릴 수 없다.
이 책이 이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 이유는 사라짐을 비극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라짐은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관계의 기준 이 사람에서 구조로 이동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이 신호를 인식하는 순간, 사람은 처음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더 이상역할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사람으로 돌아올 것인지.
이 선택은 관계를 버리는 선택이 아니다. 사라지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그리고 이 선택이 가능해지는 순간부터 관계는 다시 사람을 중심으로 재정렬되기 시작한다.
이 책의 다음 부는 바로 그 재정렬의 조건을 하나씩 살펴본다. 관계는 어떻게 사람을 소모시키는지, 그리고 그 소모가 어디에서 멈출 수 있는지를.
1부에서 우리는 사람이 언제, 어떻게 사라지기 시작하는지를 살펴보았다.
2부에서는 그 사라짐 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작동 방식임을 구조적으로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