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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화석 Oct 04. 2024

정현종의 "섬"에 대한 관심

내 삶의 안쪽_21. 

정현종의 시는 자주 짧게 쓰여 진다. 시 “섬”은 단 두 줄뿐인 매우 짧은 시이다.(다음 아래에서 인용하는 정현종의 시 “불쌍하도다” 역시 6줄이다). 그만큼 함축, 비유와 비약이 많을 것이며, 따라서 내포하는 상징성도 클 것이다. 한편 이러한 생각이 시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을 집중하고 몰입할 언어장치(linguistic structure)가 단순하니 의외로 이해하기가 수월할 수도 있다는 반대의 생각이 가능하기도 할 것이다.  


 보통 ‘섬’은 고립과 폐쇄를 연상하게 한다. 어울리지 못하고 동떨어져 있으니 외롭고 소외되어 있는 대상으로, 그래서 적절한 정보와 어울림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가 부족하니 뒤쳐진 느낌과 안타까움이 연상되기도 할 것이다. 물론 순전히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인식이다. 그럼에도 ‘섬’은 고유하고 순수하여 세파(世波)에 덜 휩쓸려있는 듯이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섬은 자신의 색깔을, 고유한 개성과 이미지를 비교적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순결한 영토 같기도 하다. 


 정현종은 ‘사람’들을 어찌 보고 있는 것일까? 이 시에 등장하는 주된 대상의 개념어는 ‘사람’과 ‘섬’이다. 이 둘은 서로 대비되는 개념일 수도 있다. 또는 서로를 끌고 밀어주어 상승작용을 하는 상호 상관성이 매우 깊은 동류의 개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정현종 시인은 “그 섬에 가고 싶다.”라고 군더더기 없이 훅 들어오듯이 자신의 강한 의사를 거침없이 던진다. 정현종은 대체로 머뭇거림이 없는 듯하다. 자신의 색깔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려고 다소 우회적인 듯하지만, 자신의 주장은 피하지 않는 편이다. 그의 짧은 시풍은 늘 그런 식이다. 다른 시를 하나 인용하여 살펴본다면, 그의 시 “불쌍하도다”에서도 그런 인상을 주고 있다.    

  

시를 썼으면/ 그걸 그냥 땅에 묻어 두거나/ 하늘에 묻어둘 일이거늘     


하다가 곧바로 내가 불쌍하다면서, “숨어도 가난한 옷자락 보이도다” 하고 푸념하듯 외치고 있다.      


 분명 처음엔 무엇에 대한 고민을 하고 분별(分別)을 위해 생각에 잠기는 듯하지만, 일단 생각이 정해지면 중간과정이 그대로 생략이나 된 듯이 결론이 그대로 나타난다. 나의 무엇이 불쌍하다는 것인가? 시를 발표한 것이 불쌍한 것인가? 아니면 숨었어도(시를 통해 자신을 포장하거나 다르게 보이도록 하고 싶었으나) 드러나고 만 자신의 부족한, 즉 가난한 모습이 불쌍하다는 것인가? 결과적으로 어느 쪽이든 가릴 것 없이 그저 스스로 불쌍하다고 단정하며 자신의 생각을 토로하고 있다. 


 정현종은 이처럼 나름 흡족한 마음이 들기 위해 시를 열심히 쓰고 난 뒤,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어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함께 즐기고자하는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시를 발표하는 것이 문제될 것이 없는데, 순간 그런 것이 마땅치 않아지는 것이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그런 자신을 불쌍하다고 공표해 버린다. 그 이유는 시를 통해 자신의 “가난함”을 숨기고자 하였지만, 어쩌지 못하고 다 숨기지 못한 채, “가난한 옷자락”이 보이게 되니, 결국은 그것을 숨길 수가 없음을 알게 된 것에 자책을 하는 심정이 되어버린다. 


 정현종은 다른 시인들처럼 자신이 시를 쓰는 것이 자기 성찰과 더 나은 가치의 세계에 대한 탐구와 같은 근원적인 것이라면, 왜 이것이 구차하다고 여겨지는 것일까? 즉 충분히 완성된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한 자기 성찰과 자아비판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이는 자신만의 몫이 결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정현종은 자신만이 아닌 집단의식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는 집단주의적 관점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그가 속한 집단, 사회에 대한 소속감이나 그에 따른 책임의식이 늘 자신을 감싸고 있기에, 그는 그저 자신만의 성찰이나 노력을 통해서는 해결이 어려움을 느끼게 되면 자신의 무력함을 확인하게 되고, 그로 인해 스스로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구조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정현종은 이 시 “섬”을 1970년대 후반에 썼다. 장석주는 1970년대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1970년대에는 시의 암호화 현상과 구호화 현상의 압력이 시인들의 의식을 짓눌렀고, 실제로 많은 유능한 시인들이 압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가지의 함정 속에 빠져서 조용히 안주하거나 상대편 시적 경향이 그릇되다고 떠드는 목소리가 유난히 시끄러웠던 연대였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정현종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기 세계를 지켜나가고자 하였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런 나름의 복잡한(?) 시대환경에서 정현종은 자신만의 세계에 안주하며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며, 또는 그런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서 해결을 구하거나 탈출을 시도하기를 원하는 상황에 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시 “섬”을 통해 어느 쪽에 있건 자의적인 해석을 통해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마다 자유롭게 선택하여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정현종은 어느 쪽도 특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기고 싶다. 그것은 결국 사람들에게서 답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인데, 사람들을 피하건 사람들을 찾건, 그 속에서 발견하는 희망만이 우리가 구할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한다. 사람들 속에 나와 우리가 원하는 곳이 있고, 그런 염원을 드러내면서 정현종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 한다. 따라서 이 메시지를 전함에 있어 군더더기나 군말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단호하며 머뭇거림이 없는 선언은 “불쌍하도다” 에서처럼 명쾌하며 당당하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한참 논쟁의 불씨가 되었던, ‘순수’와 ‘참여’ 의 대립과 같은 시대상황을 넘어, 도피와 회피가 아닌 그러나 고고하고 순수한 척하는 비현실의 담론에 빠지는 것도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지키고 찾을 그 무엇을 위해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으로 가고자 원한다. 그리고 조용하고 그윽한 눈으로 함께 가지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장석주(1986), “한 완전주의자의 책읽기”, 청아,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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