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수 작품전, 갤러리 치유, 2024 11/5(화)~12/2(월)
“자연에 진심인 작가의 시선과 교감”
대학로(동숭동)의 「갤러리 치유」에서 11월5일(화)부터 12월2일(월)까지 열린 박명수 작가의 18번째 개인전을 보았다. 그의 작품들을 우연히, 그리고 처음 대하는 것이었지만, 그의 화력(畵歷)만큼이나 기교가 뛰어날 뿐 아니라 자연을 대하고 선택하는 자세가 매우 “경건”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의 작가정신을 한 동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갤러리 치유」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병원 복도에 마련된 서울대학교병원의 부속시설이다. 병원이라는 일상과 다른 분위기, 즉 여유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할 분주함이나 묘한(?) 긴장감마저 도는 것은, 선입견 탓이지만 병원의 특성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 복도에 갤러리를 설치하고 운영한다는 발상에 대해서 이를 실제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특별하게 자극할 만한 것이다. 건강이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절대적인 부분이며, 병원은 건강문제를 직접 대하고 처치하는 장소이므로 일상에서는 거리를 두고자 하지만 막상 현실이 되어버린 당사자들은 평소와는 다른 감정을 겪는 곳이다. 이런 처지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 예술작품을 대하는 여유(?)를 바라는 시도는 건강에 대한 새로운 발상이며 뜻밖의 제안이 될 수 있으니 한편으론 일상적이지 않은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갤러리의 운영은 전문 큐레이션팀의 몫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데, 그 전시의 내용이 만만하지 않다. 박명수 화가의 작품전 뿐 아니라, 얼마 전 끝난(2024 8/15~11/14) 「김상경」 화가의 “대지의 태동”전(서울대 병원 외래 갤러리 2전시관) 역시 특별한 주제의식이 있는 수준 높은 기획 전시라 할 만하였다. 따라서 이런 식의 융합적인 발상으로 문화예술과 공공의료시설과의 컬래버(Collaboration)가 주는 신선한 의도와 성과의 시너지(synergy)는 대중들을 잔잔하고도 깊게 자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서울대 치과대학병원의 <갤러리 치유>의 naming “치유”는 보통의 전달개념인 “치유(治癒, Healing)”의 의미가 아닌, “치(齒)”와 “유(YOU)”의 합성으로 조어(造語)된 BRAND임이 소소한 즐거움을 더해 준다.
박명수 작가의 작품들은 풍경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정통 화법의 산물들이다. 그림이 구도와 형태, 그리고 색채의 조합에 의한 것이라면, 우선 박명수 작가의 정확하고 바른 시점(視點)의 구도는 구도의 정석이라 할 만하며, 빛과 채색의 어울림은 작품을 통해 미학적 감동을 경험하게 해줄 뿐 아니라, 작품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깊이 성찰하며 진중하다는 인상을 준다. 또한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삶의 형세와 균형추를 조절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박명수 작가의 풍경화는 자연에 대한 시선과 관조가 남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의 자연을 대하는 시선은 넓고 깊은 곳을 향하고 있으며, 자연과의 은밀한 교감을 위해 자연이 이끄는 대로 발길을 마다하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대체로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한적하고 외진 곳에 이르러 자신의 화구를 펼치고 대상과의 교류를 내면으로 받아들인 후 화폭 위에 시각적 재현을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18번째 작품전에 전시된 20점 안팎의 작품들 대부분은 그렇게 대상을 선택하여 그려 낸 것이라 할 수 있었는데, 필자는 박명수 작가의 작품을 처음 대하는 처지이니 섣부른 판단을 미루고 있으나 그만의 진득한 자연에의 탐구자세가 느껴진다.
그는 대상을 오래 관찰하고 차분히 채색하면서 빛에 의한 대상의 변화와 차이를 명확히 그려내는 호흡이 긴 작가인 듯하다. 그의 작품들은 빛을 통하여 자연과의 은밀한 교감을 전달하고 있으며, 균형과 조화를 이루되 작품의 정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은밀하고 속닥이는 이야기를 담아내려 하고 있다. 적막한 장소에서 귀를 기울여 몰래 들을 수 있는 소리를 기대하거나, 기척으로 들었던 자연의 소리를 애써 찾으려는 자연과의 교감의 소리일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한다.
빛은 사물의 형태를 드러낼 뿐더러 색과 명암을 만든다. 그리고 우리의 창의적 상상을 자극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 “무언가”는 빛을 다루는 그의 솜씨에서 비롯되는 것일 것이다. 그 빛은 이른 아침의 서기(瑞氣)어린 빛이고, 오후 무렵의 잔잔하며 다정한 빛이다. 그 빛으로 살아나는 자연의 명암이, 이미 익숙한 장면을 다르게 보이도록 한다. 그러면서 대상의 풍경 밖으로부터, 또는 풍경 속 빛의 ‘너머’로부터 “무언”가 다가오거나 ‘부름’이 있을 듯 여겨지게 한다. 인기척이라곤 없는 적막한 그곳에 누군가 바라보는 것 같은 기운이 전해져 오면, 결국 내가 다가간 것이 아니라 나를 이곳으로 불러 오게 한 “자연의 힘”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마치 자연의 “응시(凝視)”를 경험하는 듯하다(자크 라캉의 ‘응시’ 개념을 거론하려는 것은 아니다). 풍경의 먼 곳으로 부터 자연의 시선이 느껴지고, 그윽한 자연의 응시에 화답(和答)하며 자연스럽게 교감을 나누다 보면, 인기척조차 없던 고요한 그곳에 서서히 생기가 돈다. 아침 햇살에 깨어나는 라벤더는 서서히 자신의 고혹한 미와 향내를 뿌릴 듯하고(「라벤더 밭」), 겨울 호수를 비추는 아침 해는 자연의 생명들에 화색을 띠게 한다(「따뜻한 겨울」). 그리고 아름다운 단풍나무 사이로 새어 들어온 오후 햇빛은 적적한 가을 숲길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중이다(「단풍 숲」). 또한 바람소리 고요한 계곡의 마른 내를 따라 산속 바위 뒤쪽으로 부터 누군가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나타날 것만 같다(「설악 천불동계곡」). 이렇듯 박명수의 작품들은 정지된 자연의 일부를 자신의 화폭에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시선을 주고받으며 교감을 나눈 은밀한 이야기 거리를 담아내고 있다.
박명수 작가가 이번 전시에 내건 작품들은 이러한 내밀한 자연과의 교감을 담아 표현한 것들이다. 작가는 누구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외딴 산속의, 그리고 선뜻 다가가기에도 신비스러워 보이는 비밀정원을 마주하면서 자신만의 ‘비현실의 정원’에서 온갖 추억과 향수를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곳은 작가가 스스로 선택한 곳이 아닌, 자연의 힘에 이끌려 들어가 체험한 비밀스런 장소로서 그대로를 기억에 담아두려는 듯이 자신의 시선에 들어온 보이는 대상을 화폭에 재현한다(「비밀의 정원」). 그리고 ‘인제 백담사’ 부근의 계곡을 흐르는 작은 하천의 일부를 그린 작품 「인제 백담사」는 빛이 들어오는 곳을 향해 시선을 모으면서, 그 뒤쪽에 보이지 않고 숨겨져 있거나 곧 모습을 드러낼 것 같은 ‘무엇’에 대한 기대감을 유발하며 관찰자의 시선을 잡아끈다. 작품 「남설악의 장군바위」도 마찬가지이다. 역광으로 비추는 오후의 햇빛으로 인하여 형체가 드러난 장군바위는 노랗고 하얗게 환히 빛나고 있는 앞 쪽의 단풍든 나무들과 대비되어 부각되고 있으며, 바위 뒤쪽의 태양빛을 그대로 받은 능선은 선명하고 밝게 드러나고 있어 배경으로 적절히 살아나며, 바위에 가려진 경치들을 매우 따스하고 안온할 것으로 상상하게 한다. 이렇게 눈앞에 보이는 경치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경치 또한 상상 속에서 그려내면서 단지 자연의 일부를 재현한 풍경화가 아닌, 보는 이의 내재된 상상의 욕구를 한껏 자극하고 있다.
그의 풍경화는 일부는 임페스토(impasto)기법으로 그리는 등(「모네 연못」 등), 자연에의 탐구와 관찰을 바탕으로 한 사실주의적 화풍이지만, 그림을 통한 메시지는 자연에 대한 신성한 느낌을 담아내고 있다. 단순히 그가 바라본 대상의 재현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스스로를 자연 속의 일부로 동화하려는 자신의 예술적 사고와 정신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자연을 재현하는 것은 단지 자연 그대로를 모방하는 것이라기보다 역으로 이데아를 염원하는 예술행위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신이 자연이라는 대상과 마주하는 순간 발생하는 심적 동요로 인한 영감을 화폭에 담고자 하였다. 이런 내적 체험은 우연이 아닌 오랜 기다림이나 숙성된 자신의 깊은 의식에 의한 것일 수 있다. 그가 어느 때라도 볼 수 있는 대상의 한 부분이 아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eidos, 형상)을 찾아 화폭에 담아내고자 하는데, 이것은 자연에 대한 그 만의 ‘미메시스(mimesis)’라 할 것이다.
박명수 작가는 스스로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자연은 인간에게는 참된 진실의 대상이며 자신의 이상을 접목할 원천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을 이끄는 자연의 힘이며, 인간이 의존하는 원천이라 할 것이므로 자신의 생애를 바쳐 풍경화를 그리는 이유라고 설명할 만하다.
필자는 그의 아름다운 풍경화에서 그가 숨기는 듯 담아 둔, 그의 은근한 소망을 들여다보면서 즐겁고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강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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