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화가 김희진의 30회 개인전, “IGNITE”
인사아트센터 1층, 2024 12/4(수)~12/9(월)
“IGNITE”는 ‘~에 불을 붙이다, 점화하다’ 는 뜻으로, 인사아트센터 1층에서 2024년 12/4(수)~12/9(월) 동안 열린 김희진 작가의 서른 번째 개인전의 주제이다. “불꽃” 또는 “폭탄의 심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타들어가는 불꽃”에서 작품의 모티브를 찾은 것인데, 필자는 이런 시도의 배경과 그 작업과정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으며, 이에 대한 단서나 해답은 그의 작품들에서 찾아 볼 수 있을 테지만, 주제를 통해 매우 역동적이며 공격적인 느낌을 받게 되었다.
전시장 한쪽 벽에는 폭탄의 도화선을 태우며 타들어가는 불꽃 동영상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는 전시의 주제를 강조하거나 작품이해를 위한 친절한 안내인 듯한데, 폭탄은 보이지 않는 도화선에 점화된 “불꽃” 또는 “타 들어가는 불꽃”만을 보여주니, 곧 작품 창작의 기본 단서이거나 모티브를 확인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대뜸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불의 정신분석”에서의 ‘불’에 관한 인식론적인 사유와 접근 태도를 떠올리며 김희진 작가도 이처럼 자신의 예술세계와 창작의 과정을 “불”에 연관하여 “역동적 상상력”을 발휘하려는 시도인 것인가라는 일방적인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작가노트에서 김희진은 「ignite」는 “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순간, 타들어 갈 때 나타나는 그 내면의 잠재되어 있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표현한다.”고 쓰면서 “도화선에 붙은 불꽃의 파열음과 함께 느껴지는 시선과 청각의 자극은 긴장감과 설렘을 내포하며 터지기 직전 그 순간은 가장 고요한 모습을 지닌다.”고 하였다.
불꽃이 타오르고, 불꽃이 타들어 오는 순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폭발적인 에너지에 대한 표상(表象)을 기대하는 작가의 다소 도발적이면서 신선한 시도에 관심이 모아지자, 필자 역시 그가 시각적으로 드러내 보여 준, 내면의 속살과도 같은 그것들에 몹시 이끌렸다.
이처럼 스스로 자극을 가하며 내면으로 부터의 긴장과 동요가 불러올 것들을 기대하는 작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절박하게(?) 열망하는 것, 스스로를 제3자화 하고 관찰자가 되어 자신에의 반응을 보고자 한 것은 결국 자신 내면의 넓고도 깊은 의식과 무의식 세계의 카오스Chaos와도 같은 질서의 표상을 꿈꾸는 것이었을까? 스스로의 심지를 태워 터트리고야 마는 불의 희생을 보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 역시 자신의 심지(心地)를 태워 소진하여 보고자 하는 것, 그것을 관찰하고 탐구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김희진 작가의 「ignite」는 살신성인(殺身成仁)과도 같은 심정의 결과들일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김희진의 이전 작업들은 알 수 없으나 이번 개인전은 “ignite”라는 주제의식을 통해 작업의 방향을 정하고 있는데, “ignite”라는 키워드가 명사가 아닌 동사인 것은 그의 시도가 동적인 행위로서 이미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자신의 정신과 내적 탐구의 과정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불꽃을 점화하는’ 예비적이면서 점화하는 동작은 점화된 순간부터 타들어가 폭발 이전까지의 단계를 의미한다면, 그 과정동안에 그가 받고 느끼는 심적인 반응과 그에 따른 반응행동을 기대하는 것일 것이다. 애초부터 그가 ‘기대하고 설레인다’고 한 예측 불허한 미지의 표상을 위해 그는 작업 내내 무의식적 욕망의 분출을 자유롭게 경험하였을 법하다.
그러나 김희진은 타들어오는 불꽃을 바라보며 기대감과 설렘을 예상한다하면서도 현실에서는 그리 안이할 수는 없었을 터이다. 실제의 상황에서 도화선이 타들어오는 과정을 지켜보는 심정이나, 그 결과의 예상은 인간의 지식과 인식의 기준으로 그 감정반응의 크기에 대해서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희진 작가는 위험하고 도발적인 실험적 도전과제를 스스로 던지며 자신을 대상으로 그 과제 보고서를 몸소 작성하는 중이다.
불꽃이 주는 이미지는 상상속의 파괴처럼 극단적인 결과와 관련되기도 하고, 폭발 전까지의 과정을 통해 심지가 타들어가는 불꽃의 흐름이나 연속된 불꽃의 동작을 통해 관찰자적 시선으로 새로운 영감을 유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할 때, 어느 정도는 여유있고 넉넉하게 불꽃의 인지적 이미지와 그의 동작,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발생하는 내면의 작동이나 반응을 표상화하는 작업에 집중하였음을 느끼게 된다.
필자의 시선으로는 그가 전시장에 내걸은 작품들이 어느 정도는 과격하거나 파열(破裂)적인 형태나 표상으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시각적 표현으로 그려낸 그의 잠재의식 세계에서의 불꽃에 대한 반응은 오히려 냉정하고 차분하기까지 하다. 또한 다양한 형태나 칼라를 배합하거나 고려한 흔적까지 드러나는 것을 보면, 단지 도화선에 불이 붙은 위급한 상황을 전제 했지만, 이성과 과학적 인식에 근거한 지적이고 체계적인 실험의 결과인 것처럼 꽤나 조화롭고 안정되어 보이며 미학적 측면마저 돋보이고 있다.
김희진의 작품들은 모두 「무제(無題)」이거나 「ignite」연작이다. 작품명이 「무제」인 것은 작가와 독자가 알아서 읽어내야 하는 숙제와도 같은 guide line을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넓고 기준이 없으니 한편으론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읽고 해석하면서 느끼라는 무언의 제안이기도 한 것이다.
김희진의 작품들은 실재 대상을 바라보며 재현한 것이 아닌, 관념이 만들어낸 표상이며, 무의식을 가장한 의식이 만들어낸 추상적 표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자 박이문 교수는 “예술작품은 우연적인 자연현상이 아니다. 주체자가 의도적으로 계획하여 만드는 것이며, 예술작품을 만들려는 의도는 늘 어떤 객관적 대상이나 생각, 느낌이라는 심리상태를 나타내려는 것이다.”라고 자신의 글에서 밝히고 있고, 또한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Munch) 역시 “예술은 자연에 대립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다만 내면에서 온다. 예술은 인간결정(結晶)에의 충동이다.”라고 했는데, 이처럼 예술작품은 무언가를 표상하고자 하는 것이며, 특히 그림은 무언가를 구상(具象)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김희진의 작품들이 표상하고 있는 것들은 도화선에 불이 붙어 타들어 가는 불꽃에 대한 역동적 이미지와 더불어 발생할 긴박감 등의 의식이 작동될 때 반응한 무의식적 추상에 대하여 그 내면의 의미하는 바를 드러낸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 중에는 신체 내부의, 장기(臟器)들이 엉켜있는 듯 하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그러나 특정하게 상상하기엔 기괴하기도 한 형상이 거칠고 단순한 붓 터치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원형질(原形質)의 모습에 가까울 듯하고, 그 내면을 들여다 보고자하는 욕망을 드러낸 것인가 싶다. 대체로 작품들의 채색은 단순하고 절제되어 있지만 단조로움 속에 이형(異形)의 표식들이 어울려 있다. 폭이 넓은 붓으로 가볍고 천천히 칠을 했으나 이미 바탕에는 곧은 선이 강한 힘으로 새긴 듯 그려져 있다. 그 위에 덧칠하듯 붉은 색감으로 가볍게 칠하였는데, 간단치 않은 깊이와 복잡함의 상징 같기도 하다.
한편 붉은 색 테두리가 언뜻 드러나 보이는 흰색 바탕의 캔버스에는 실타래를 뭉쳐놓은 것 같기도, 굵은 면발을 둥글게 감아 놓은 것 같기도 한 형태를 굵은 붓 터치로 무질서하지만 집중하여 한 번에 그으면서 끊이지 않고 오래도록 선을 그어 만들어 내었다. 전달되는 이미지는 쉽게 와 닿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사롭게 볼 수 없는 무질서 속의 질서를 엿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긴 곡선을 연이어 그으면서 만들어 지는 선의 이어짐은 무엇이든 연결되어 끊임없이, 직선은 아니더라도 나아간다는 비유를 의식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반면에 다른 작품들에서는 짧은 선들을 가로로 세로로 그으면서 형태를 만들고자한 흔적들을 보여 준다. 역시 마구잡이로 그은 듯 거칠고 투박하다. 자연의 혼돈이 이러한 모습을 띠기라도 하였던 것일까? 정리되고 안정화되기 전 원형질 자체의 성질을 염두에 둔 무의식적 반응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의 의식에는 낯설지만 새로운 궤적을 통해 주목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렇게 의미와 무의미를 넘나들며 작가는 단색이거나 단순한 궤적으로 붓 칠을 하며 여러 형태로 형상화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마치 제3자처럼 관찰하며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다. 결이 거친 대형 붓을 이용하거나, 또는 스스로 제작한 자기만의 도구를 이용하여 길들여지지 않은 거친 원형(原形)의 세계를 보여주려 하고 있다. 이것은 긴박하고 비일상적 상황에 따른 내적 동요를 시각화하여, 어느 하나로 모아질 수 없는 다양한 변형과 그 흔적들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작가는 이런 식으로 수많은 부분들을 찾아내어 개별의 형태들을 하나로 모아서 보여주려 하는데, 이것들은 하나로 모으니 꽤나 조화롭고 이성적이다. 개별의 캔버스는 고작 5호도 안 될 작은 크기이지만, 4개의 횡렬로 22개씩 총 88개를 하나로 묶어 전시장 한 벽면에 게시하고 있다. 마치 모자이크하듯 언뜻 보면 불규칙한 작품의 배열이지만 매우 조화롭게 질서가 느껴진다. 이렇게 외부의 자극을 지각하는 스스로의 의식세계, 또는 무의식 세계를 표상함으로써 작가는 자신을 타자화(他者化)하고 외부의 관찰자로 하여금 그를 인식하도록 하여 진정한 주체적 정체성(identity)을 확인하려는 의도를 전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세로로 긁듯이 흔적을 내어 바탕의 색들이 얼기설기 드러나거나 혼재된 상태에서 노랗고 파란 색을 칠한 후, 꽃 모양의 검은 형태 선이 미완의 상태처럼 화폭에 그려져 있는 작품에서는 보기에 따라 매우 안정되고 균형이 잡혀 보이면서 아직은 드러낼 수 없으나 어떤 일을 앞둔 상황마냥 조심스런 기대감이 엿보인다. 물론 필자의 직관적인 반응이므로 누구나에게 공감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느낌은 캔버스에 옅은 색감이 나오도록 아크릴 물감에 물을 많이 섞어 자유롭게 곡선을 그리거나,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식으로 여러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는데, 2~3개 작품을 하나의 조합으로 대비하면서 작품을 완성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자유로운 궤적이 눈에 띠지만 채색의 의도는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여러 층의 바탕 색 위에 마지막으로는 노랗거나 옅은 마젠타, 또는 혼합된 색이 두드러지도록 색칠을 하면서도 은연중에 어떤 형태를 표현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아마 이는 무의식을 가장한 자신만의 도취적인 즐거움의 표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김희진 작가의 작품들에서는 정신적 내면을 단련하면서도 자신의 예술하는 이유와 창작의 즐거움을 지켜가려는 천진함이 느껴진다. 또한 도처에 긴장과 치열함의 단서를 배치했음에도 그의 작품들은 밝고 단순하며 무겁지 않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붓질이 만든 곡선의 흐름이나 덩어리들은 마치 깊은 내면의 속살과도 같이, 그것이 상징하며 드러내는 메타포metaphor로의 의미와 상관없이, 복잡함이 없이 단조롭고 깨끗하다. 그리고 원형질(原形質)의 상태를 표상하기 위하여 그려낸 궤적은 쉴 새 없이 생기를 띠며 작동하는 생명에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따라서 작가의 은밀한 호기심이 만들어낸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흔적과도 같다.
김희진 작가는 자신의 심상을 조형적 요소에 충실하며, 회화적이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려 하였다. 이는 단순화한 구조나 형태이지만 지루하지 않으니 흥미를 유발하기 까지 한다. 그리고 그가 작품을 통해 보여준 것이 신비함, 또는 호기심을 넘어 탐구에 대한 열망을 지속하는 것이라면, 또한 이것이 예술가에게는 숙명적인 인자(因子)라고 할 수 있다면, 김희진 작가의 의도된 실험적 시도는 매우 뜻깊은 행동적 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로써 김희진의 작품들은 “ignite”를 통해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상(具象)한 것이면서 내적 의식세계의 반작용으로 표상해 낸 비구상적 예술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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