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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갤러리 산책가는 날.31

추상미술작가 박준수 개인전, “Virus_오늘날의 장자는 어디에 있는가"

by 강화석

인사아트센터 2층 충북갤러리에서 2024년 12/4(수)부터 12/16(월)까지 2주간 열린 추상미술작가 박준수의 서른일곱 번째 개인전의 주제는 “Virus_오늘날의 장자는 어디에 있는가” 였다. 현실인식이 깔려있는 다소 선언적인 화두(話頭)라 할 만 하였다. 필자는 박준수 작가의 작품을 처음 대하는 입장이지만, 그가 <Virus>와 <장자>를 끈질기게(?) 지속하는 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오늘날의 장자”를 관점으로 삼은 이유는 그가 이전부터 <장자>의 존재나 그에 관련된 정신이나 사상에 관심을 기울려 왔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또한 <장자>로부터 비롯된 정신과 사상을 자신의 내재의식이나, 예술관을 통해 작품으로 재해석하여 추상적 표현을 시도하는 중일 것으로 유추해 본다. 한편 <Virus>는 작품들의 통합적 주제로 선택하였기에 분명 자신의 의도와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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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수 작가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환각사회>로 보고 있으며, 인간은 스스로 주체로서의 존재와 인식을 명확히 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반성을 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보는 것들이 가상이거나 허상이며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검증에 이르기도 수월하지는 않다. 일찍이 사르트르와 라캉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주체는 스스로 타자화(他者化)하고 타자에 의해 보여 지는 것이 주체(자신)라고 하였는데, 우리가 실존의 근거를 알 수 있는 것은 타자의 시선을 통해서 이며, 주체(자신)는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객관성을 얻게 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보는 스스로를 (타인이) 보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은 분명 스스로 존재와 인식이 일치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주장대로 라면 우리는 스스로와 세상이 실체 그대로가 아닌 ‘환상’이거나 ‘환각’의 상태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통찰을 하게 된다면 오늘날의 세상이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며 나아가 욕망과 탐욕으로 넘쳐나고 있으며, 환각상태에 처한 세상에서 납득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에 스스로 빠져 살아가는 것과 다름없다는 인식에 도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의 세상은 모두가 알다시피 경쟁사회이며, 물질만능의 사회인데, 이는 과학기술문명체계를 통하여 생활환경의 편리함과 윤택함을 꾀하면서 극도로 결과의 효율성을 추구하려 한 원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동양사상의 입장에서, 동양사상의 양대 축이라 할 유가(儒家)사상과 도가(道家)사상 중, 유가사상에 따른 경세철학(經世哲學)의 성과라 할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는 극한적인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분위기에서 삶의 가치는 시장논리에 종속된 시장지향사회, 상식적인 사유보다는 신비로운 권위에 의지하는 신앙생활에 젖어 사는 사회가 되어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하여 장자연구가이며 소통학자인 김정탁 교수(성균관대)는 자신이 쓴 시론(時論)에서 이런 부분들을 진단하면서 현 사회에서 더욱 심각한 것은,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이 지배하는 ‘정글자본주의’, 진지한 성찰 대신 대중문화와 맹목적인 믿음에 함몰된 ‘환각사회’를 잉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박준수 작가가 자신의 작품 주제를 <Virus>로 정하고 이에 통합개념으로 <Virus_환각>이라 설정한 것은 김정탁 교수의 의견에 부합하는 현실인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따라 박준수는 이러한 현실 인식에의 확인과 대중과의 교류를, 나아가 자신만의 해법을 추구하되 이를 스스로의 객관화를 통해 타인들과의 교감과 일체화를 위한 대장정(大長程)의 길을 나선 것인가 싶었다. 물론 <환각>의 의미를 박준수 작가는 “일어나는 현상세계에서의 대상을 보여 지는 대상으로 결정지으려는 심리적 상태 사이의 갈등”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환각은 실상과 가상사이 본질에 대한 물음, 자기와 외부세계 사이의 교차점, 갈등, 접촉, 간격, 불안, 거부 등에 ‘자기화 된 현상’이 일어나고 그 모호한 경계선 상에서 탐색이 일어난다.”고 보완설명을 하고 있는데, 아무튼 박준수 작가는 현실에서 <환각>의 현상을 발견한 후, 장자를 통해 그에 대해 극복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통찰의 내용, 또는 그 메시지는 무엇이어야 하는 지에 대한 강한 구도적 염원을 가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박준수 작가는 전시주제를 <Virus_환각>과 같이 <Virus> + <환각>의 2원 구조형식으로 <Virus_오늘날의 장자는 어디 있는가>와 <Virus_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시리즈, 그리고 <유(遊)_세상의 모든 것> 시리즈 등 두 개의 영역으로 작품의 주제를 구분한 추상작품들을 표상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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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의 영역은 기존의 <장자연작>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장자는 “인위(人爲)를 배제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을 기본으로 한다. 무위(無爲)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 ‘하고자 함이 없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위(有爲)는 인간이 이루고자 하는 인위(人爲)가 대표적이며 ‘하고자 함이 있는 것’이다. 이는 지나치면 작위(作爲)로 변하게 된다. 유위가 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 하는 것이라면, 무위는 일을 무리하게 하려하지 않고 ‘자연의 순리’대로 처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연의 순리, 즉 사계절의 변화와 움직임과 같은 우주 자연의 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고 통제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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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장자는 ‘장자내편 제물론’에서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자유로움을’ 즐겼다. 이때 장자는 자신과 나비의 구분이 있어야 함에도 그럴 수 없었으며, 이를 통해 물화(物化)를 경험하게 된다. 즉 이는 “만물제동(萬物齊同)”으로서 만물은 변하는 것이며 그것을 차별하여 보려는 것은 사람이 만든 상식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곧 “호접지몽(胡蝶之夢)”은 무차별의 세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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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수는 이러한 장자 사상을 바탕으로 <Virus_오늘날의 장자는 어디 있는가> 시리즈와 <Virus_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시리즈를 서로 대조적으로 작품화 하였다. 전자(前者)의 연작들은 모두 흑색 바탕에 붉은 색의 두상(頭狀) 실루엣을 그렸으며, 후자(後者)의 작품들은 반대로 적색의 바탕에 검은색으로 역시 두상을 실루엣으로 그렸다. 이때 두상의 형태는 명확하지 않으니 어렴풋이 두상일 것으로 유추할 정도로 성글고 거친 방식으로 그려졌으며, 채색도 일정하지 않으며, 완전하지 않고 어슴푸레하게 그려졌다. 아마도 칼라를 서로 대조적으로 그린 것에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서도 적색과 흑색의 대비는 분명 의미가 없지는 않으리라는 인상을 갖게 한다. 필자는 프랑스 작가 스탕달의 “적과 흑(La Rouge et le Noir)”을 연상해 보았다. 19세기 프랑스 사회상을 그린 이 소설에서 적색은 ‘군인’을, 검은 색은 ‘성직자’를 상징하기도 한다. 당시 사회의 인물들이 처했던 개인적 환경과 정체성, 그리고 사회적 지위와 신분 변동을 욕망하며 모색하고자 한 기회요인들, 당시의 모순적인 제도와 사회체제에서의 갈등 양상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비극 등 인간의 진심이나 욕망을 표현하고자 한 사실주의 소설인 “적과 흑”이 주는 우회적인 연상을 배제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무튼 전자의 작품들을 통해서 박준수 작가가 그간 추구했던 인간의 정체성, 스스로의 존재와 인식의 문제를 탐구하려 한 시각적 표상이나, 그 과정에서 자신에의 실체와 현실에서 드러난 현상에 대한 이해 노력, 더불어 자아 성찰을 통해 자신의 내재화된 사유를 시각적으로 표상하려는 한 것으로 생각해 볼 뿐이다.

반대로 후자의 작품들은 색채의 반전이 있으며, 한편 두상의 실루엣의 형태는 전자의 작품들과는 거의 유사하면서도 다소 다르게 그려져 있다. 즉 두상 아래 부분에 의도적으로 그려진 굵은 선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물론 작품의 의도를 읽기 위하여 그림의 제명인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를 단서로 삼아 작가의 내적 창의성을 읽어보려 한다면, 두상에 그려진 꺽은 선과 직선들을 자연의 일부이거나 날아다니는 존재로서 경험할 수 있을 대상에 대한 시각적 체험의 상징적 표시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를 구체적으로 특정하여 읽어내려는 노력은 그다지 의미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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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접지몽에서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의 의미는 “꿈속에서 ‘나(장자)를 바라보는 ’나비‘를 보았다”는 것으로, 이때의 ’나비’는 주체(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환상(환각)>의 기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환상(환각 속에서)을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또는 세계는 일종의 환상(환각) 아닌가?“라는 질문이기도 한 셈이다. 곧 ’주체(자신)의 의식과 자아는 환상(환각)에 바탕 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영역에서는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사상을 바탕으로 표상화하려 하였다. ‘소요유’는 장자의 핵심 주제라 할 ‘정신적 자유’를 담고 있는데, 자유를 중시하며 외물(外物)의 얽매임으로부터 해방되어 ‘절대 자유의 정신적 경계에서 노니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유유자적하며 노니는” 여유로움을 통해 ’창의적이며 창조적인 마인드’를 가짐으로써 오늘날의 한계와 모순적인 사고를 극복할 대안을 마련해 볼 수 있다는 염원을 담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나름으로 ”유(遊)“가, 새로운 각성의 ”유(遊)“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는 장자의 기본 사상이고 가르침으로서 작품 <유(遊_세상의 모든 것> 연작은 세상의 모든 것에 자유롭고 창의적인 mind를 통한 새로운 상상력을 펼쳐보려 한 내재화의 표상(表象)이며, 나아가 이를 <virus>로 세상에 전파하려는 강한 의지를 담아 전달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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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런 인식과 실행행위로써 “점”을 통하여 새롭게 세상의 모든 것의 핵심원천을 확인하려는 제안임을 추론을 해본다. “점”은 조형의 개념단위로서 실재하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으로 믿게 하는 가상의 최소단위로서 시각적 표상을 위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것들은 동일하거나 반복적인 행동이나 표식이 아니며, 또한 각각 개별적인 소우주이기도 하고 각 객체로서 존재의미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검은 색과 붉은 색으로 바탕색을 서로 대비하고 그 바탕에 작은 크기의 화판위에 점을 표식하였다. 붉은 바탕에서는 검은 색의 점을, 검은색 바탕에서는 노란색의 점을 그린 소품을 각각 105개씩 하나로 통합하여 작품을 완성한다. 작품의 숫자, 즉 점의 숫자의 의미보다는, 적지 않은 개수의 점들은 크기와 형태가 모두 같지 않으며, 개별적이라는 의도와 이들이 추구하는 목적과 방향 역시 다르다는 것을 통하여 주체의 다양성을 은연중에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 작가는 이러한 자신의 내적 소통시도, 그리고 의미와 무의미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사유(思惟)를 통해 모색한 다양한 사고에 따른 흔적이나 궤적을 남기려는 행위과정을 탐구하는 중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결과적으로 <유(遊)_세상의 모든 것>연작은 앞선 단계에서 사유와 상상의 과정을 거친 이후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Virus>를 전제적인 key word로 선택함으로써 “자연스러움과 강제함이 포함된 전달과 확산의 의미가 담겨있는” <전파(전염)>의 의미를 담아 자신의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상상력이 보다 넓고 멀리 날아가기를 염원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강화석)



http://www.munhak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7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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