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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갤러리 산책가는 날.34

남기희 초대 개인전,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무아의 여백”

by 강화석

라메르 갤러리 1층 3전시실, 2025 01/08(수)~01/13(월)


라메르 갤러리 1층 3전시실에서 2025년 01월 08일(수)부터 13(월)까지 추상화가 남기희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무아(無我)의 여백(餘白)>이라는 주제로 초대개인전을 열었다. 요즘 동양사상을 통하여 자신의 정신적 사유와 내면의 깊이를 탐구하려는 작가들이 꽤 많이 눈에 뜨인다. 남기희 작가도 『장자내편』의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無我(무아)”를 탐구하는 작품들을 전시하였다. 이렇게 동양사상을 주제로 한 예술 활동을 일반적인 현상으로 보기는 다소 어려움이 있지만, 21세기 디지털문명 출현으로 급격한 사회 환경변화를 겪는 요즈음에 오래 전의 정신사상을 통해 성찰이나 새로움의 전망을 읽으려는 시도에서 특별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예술가들의 소임이 자기의 내면에 내재한 정신세계를 들어다 보면서 스스로와의 소통이나 사유의 과정을 통해 존재와 현상을 통찰(洞察)하고 판별(判別)하려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자연스러운 행위에 속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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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가 스스로에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간 당연시 되는 사고와 방식으로 살아오고 있고, 새삼 의문이 들어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지도 않을 터이다. 그러나 삶에 문제의식과 자신을 둘러싼 성찰을 소홀히 하지 않는 태도와 자세는 올바른 삶이나, 삶의 가치에 대한 확인에 기본적 필요요소는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답으로써 우리는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설령 공자(公子)와 장자(莊子)가 그에 적절한 지혜를 이미 주었다고 해도 우리는 그리 살아오지 못하고 있기에 무용한 현문우답(賢問愚答)을 반복할 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까지 매우 열심히 노력하며 최대한 많은 것들을 이루려는 삶을 살아오고 있다. 세상의 자원이나 주어지는 것들이 유한하고 충분하지 않으므로 ‘경쟁’은 불가피하였고, 평등하지 못한 분배와 소유, 사람마다 제 각각인 가치관으로 세상은 그야말로 혼란스런 관계 속에 치열한 갈등과 대립이 늘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당연하지만 공자와 장자가 구현하려는 삶, 의미 있는 삶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장자가 의미 있는 삶이라 한 ‘유유자적 노닌다’는 “소요유(逍遙遊)”는 고사하고 작은 세계에 갇혀 시비(是非)나 미추(美醜)를 따져가며 송나라 저공이 키우는 원숭이 마냥 ‘조삼모사(朝三暮四)’에 현혹되어 살아가는 중일 수도 있다. 그러하니 이런 작은 지혜로는 큰 지혜를 상상할 수조차 없는 처지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공자가 세상일에 대하여 “이순(耳順)”이니, “안순(眼順)”이니, “설순(舌順)”이니 하며 ‘귀(耳)’, ‘눈(眼)’, ‘말(舌)’이 순(順)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어느 누가 알지언정 쉽사리 실천할 수도 없이 되어있다. 이런 인식에 도달하면 예술가들은 나름으로 이에의 극복이나 최소한의 탐구적 노력으로 대안을 찾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런 반응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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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희 작가가 그간 계속해 왔던 작업에 대해서 필자는 알 수가 없으니 이번 전시의 대 전제인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배경에 대해서도 상세히 예측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다만 장자가 자신의 「장자내편」 ‘소요유’에서 언급하는 문제제기를 남 작가가 동일하게 인식을 같이 하면서 그에 따른 작업의 주제의식을 “무아의 여백”으로 정했다는 것은 그의 성찰과정이나 탐구노력의 깊이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그의 내면에서의 사유과정이나 깊은 고뇌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있는 것이 없는 마을(無何有之鄕)”은 유토피아utopia에 해당하는 이상향을 뜻한다. 같은 동의어로 장자는 “광활한 들판(광막지야廣莫之野)”이라 하였는데, 이곳에서 스스로를 “무아(無我)”의 존재로서 “무위(無爲)”함의 마음으로 여백(餘白)을 추구하려는 내밀한 각성과 터득의 뜻을 표상하는 결과를 드러내려 한 것일 것이다. 물론 장자의 깊은 뜻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장자의 가르침이나 사상을 따르려는 성실한 수행의 과정이 더 클 수도 있겠으나, 장자가 ‘소요유’에서 계시(啓示)한 ‘유유자적하면서 노니는’ 마음으로, 세상에서의 존재의 의미를 “무용지용(無用之用)”, 즉 “쓸모없음의 쓸모”를 발현할 수 있는 여지를 스스로 탐구하고자 하는 작가의 깊은 고뇌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무아의 여백”을 작품을 통해 표상하고자 하였는데, “無我(무아)”는 곧 “我(아)가 없는 상태”라는 뜻이지만, 이때의 “我(아)”는 “자신본래의 面目(면목)”이 아닌 “거짓된 我(아)”인 것이다. 따라서 남 작가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무아(無我)의 여백(餘白)”은 “아무것도 있는 것이 없는 이상향에 심어 놓고자 함이 없는 무위(無爲)의 마음으로 유유자적하면서 ‘거짓된 자아(我)’를 비우려 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본래의 나(吾)”에서 “만들어진 나(我)”를 버림으로서 ‘무아(無我)’의 상태인 “원래의 나(吾)”로 돌아오려는 것이다. 이것은 불가(佛家)의 사상이며, 또한 『장자내편』 2절의 「齊物論(제물론)」에서의 “오상아(吾喪我)”, 즉 “내가 나를 버린다”는 개념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만들어진 내’가 ‘원래의 나’를 압도하면서 발생하는 역전현상이 가져오는 혼란과 무질서에 대한 각성이라 할 수 있으며, 이미 2500년 전에 장자와 공자가 예상했던 인간 세상의 현상에 대한 예언적인 가르침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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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희 작가는 이런 사상적 배경을 바탕으로 자신의 예술관과 삶의 철학을 시각화하여 작품 속에 담아 표상하고자 한다. 한편 그의 이번 작업은 매우 차별적인 시도를 통해 자신의 예술을 특화시키고 있는데,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그의 ‘마띠에르(Matiere)’가 남다르다는 것이다. 즉 일반적인 접근이 아니고 물감에 모래를 섞어 마치 시멘트 반죽mortar처럼 만든 재료를 건물 외벽에 미장하듯 캔버스에 칠하여 작품화하고 있다. 이미 캔버스에 밑그림으로 그린 바탕위에 덧칠하듯 두텁게 모래를 섞은 물감을 비교적 듬뿍 나이프knife로 떠서 외벽을 마감하듯 칠한다. 자신의 실체를 감추거나 제거하려는 듯이, 자신의 심상으로 끄집어 낸 내면의 흔적이나 궤적을 닫아버리려는 듯이 칠함으로서 ‘새로운 나’로의 전환이나 변화를 시도하면서 그로 인해 생성된 여지와 여백을 통하여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지우려는 듯한 의식을 치르려는 것이다.

한편 남 작가는 정신내면의 깊은 성찰과 인식의 과정을 거쳐 스스로 겪은 감정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가 ‘무아(無我)’ 또는 ‘몰아(沒我)’의 사상을 스스로 실행하려는 의지의 표명은 그의 마띠에르를 통해 시각화 작업을 의식적으로 표상함으로서 감정과 진실사이의 차이를 드러내 보이려 한다. 물론 이는 철저히 자신의 느낌을 담아내는 것에 불과할 지라도 그의 무의식적 파동의 흐름이 담겨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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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無我(무아)’라는 개념은 불교에서의 ‘공(空) 사상’으로서 ‘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는 “색이 곧 공이요, 공은 곧 색이다(色卽是空(색즉시공) 空卽是色(공즉시색)”이라고 말하는데, ‘공(空) 사상’은 “텅 빈 것에서 만물이 비롯되는 것”이며, “곧 집착을 극복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장자가 “마음을 비우는 작업”을 고민하라고 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또한 무아사상은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독립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는 불교에서의 ‘연기법(緣起法)’으로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서로 상호의존적 관계이며, 따라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다면 저것도 없다”는 것으로서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기는 것이며, 이것이 곧 “무아(無我)”와 “무상(無常)”의 개념인 것이다. 이런 심오하고 깊은 정신사상을 바탕으로 남기희 작가는 자신의 추상화 작품들을 그려내면서 숱한 준비와 연마를 통해 자신의 주제의식에의 정리와 시각적 표상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 듯하다. 전시장의 한 복판과 한쪽 벽면에는 작품의 완성을 위한 사전 노력의 일부 인 듯, 다수의 부분적인 작품들을 나열하거나 전시display하여 놓았다. 또한 작품들은 기존에 자신에게 익숙한 기호이거나 기하학적 흔적들을 화폭위에 요동하듯 표현하였는데, 그것들은 대체로 차가운 추상적 이미지를 드리우고 있으며, 그리고 안정되고 차분한 분위기를 전해 주지만 한 차례의 열풍이 지나간 후의 뒷모습처럼 공허함을 느끼게 한다. 그의 작품들은 주로 무채색이나 단색조의 채색으로 모래를 섞은 재료임이 눈에 드러나는 몰타르mortar 물감을 재료로 하여 바탕그림이 드러나도록 덧칠을 하여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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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색을 줄이고 색의 느낌을 배제하는 듯이, 그러나 바탕에서는 언뜻언뜻 남아 있는 색들이 눈에 띈다. 그것들 간의 상호관련성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본래의 자아의 모습임을 드러내려는 것인가? 남 작가의 작품들은 스스로 선택한 형태와 채색을 통하여 자신의 내재한 자아에의 무위를 도모하면서도 자신이 경험하고 깨달은 바를 남기려는 노력을 통하여 하고자 하는 바가 없이 이루기 위한 무의식적 창조행위를 매우 편안하고 자유롭게 행하였던 것인가 싶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품들에 개별적인 작품명은 부여하지 않았으면서, “힘차게 떠오른 태양처럼”, “무아의 여백에서 만난 그대”등의 작품명이 있는 것을 보니, 간혹 무아의 상태에서 텅 비운 자신에게 의미로운 새로운 존재나 개념을 받아들이려는 시도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필자는 남 작가의 전시를 보고 난 후, 결국 인생이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면서 스스로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더하여 예술가들은 시각화를 통해 이것을 표상하여 드러내려 하며, 또한 내재한 복잡하고 내밀한 생각들을 다듬고 정리하여 표상하는 일이 지난(至難)한 것임을 알고 있지만, 마치 이를 유희하듯 유유자적 즐기면서도 나만이 옳고 나만이 해결안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닌, 자연의 순리를 따라 모두가 함께 마음과 마음으로 소통하면서 자기 몫의 노정(路程)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강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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