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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갤러리 산책가는 날.35

오채리 개인전, “색채에 사랑을(Color with Love)”

by 강화석

경인미술관 제1전시관, 2024 12/25(수)~12/31(화)


오채리 작가의 세 번째 개인전이 경인미술관 제1전시관에서 지난해 2024년 12/24(화)부터 12/30(월)까지 열렸는데, 필자에게는 다소 특별하고 인상적인 전시였다. 처음 만난 낯선 오채리 작가에게 대뜸 “색채화가”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어졌다. 전시회의 주제가 “색채에 사랑을(Color with Love)”인 것도 있지만, 전시 작품들은 색채를 과하게(?) 부각하고자 한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었으며, 나아가 작품들이 오래 전 프랑스 야수파(Fauvisme)의 화풍을 많이 닮았고, 따라서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들이 분명하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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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이렇게 뚜렷하게 유사한 풍을 받아들여 작품을 그려내는 것이 의도적인지, 아니면 스스로 추구하는 화풍이 자연스럽게 야수파와 닮게 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대체로 작품들이 야수파와 유사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필자는 오채리 작가가 현재 우리나라에서 ‘야수파 화가’로 자리매김 되어 있는지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의 작업 의도나 예술관이 궁금해 졌다. 한 눈에도 그의 작품들은 야수파의 화풍일 뿐 아니라 「마티스(Matisse)」의 작품들을 오마주(Hommage) 한 것처럼 매우 유사했다.

예술세계에서 “유사성(類似性)”은 늘 있어온 개념이다. 특히 회화는 아주 오랫동안 자연이나 대상에의 모방을 기본으로 했었고, 이러한 “유사성(類似性)”의 개념을 기준으로 하여 테크닉Technic의 진보와 함께 교묘한 모사(模寫)를 통한 실물 같은 그림을 훌륭한 솜씨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대에 「플라톤Platon」은 자신의 예술관을 다음과 같이, “회화가 목적으로 하는 바가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의 재현인가? 혹은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인가? 외관의 모방인가? 혹은 실재의 모방인가? 외관의 모방이다. 그렇다면 모방의 예술은 진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라고 피력한 바 있었다.

여기에는 플라톤의 편협한 관점이 드러나고 있기도 한데, 자신의 철학에 대한 사상을 증명하기 위해 이런 수사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이며, 철학이 외관의 밑에 깔려있는 진리에 도달하려 한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 회화나 조각을 단순한 모방으로 간주하는 것이 편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고대 비평가들은 이런 “유사성”의 기준으로 회화나 예술작품을 바라보고자 하였고, 다만 예술이 모방이었기 때문에 예술가들의 차이는 ‘테크닉’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은 현대에 이르기 까지 지속한 부분이 있었으며,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다양한 이유로 대상이나 자연 뿐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모방하고 영감을 받고, 더불어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기법들을 따르고 창안하면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창조하고 발전시켜오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20세기 가장 성공적인 화가의 한 사람인 ‘피카소(Pablo Picasso)’는 자신의 작품 창작을 위한 변명(辨明)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며,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Good artists copy, Great artists steal).”

따라서 예술 활동에서 자연이나 대상을 재현하기 위하여 자연을 모방하거나, 또는 타 작가의 작품을 따라하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으며, 다만 자신의 개성이나 독창성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성의 미학을 강조하고자하는 의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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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리 작가에게서 보여 지는 “야수주의”는 20세기 초반에 비교적 짧은 시기동안 활동하고 사라진 사조에 속하지만 매우 강렬하고 인상적인 작품을 남겼을 뿐 아니라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사실주의나 인상주의 등에 반발하는 새로운 화풍을 통해 겉으로 드러난 변화 뿐 아니라, 예술가들의 내적인 정신과 사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의 회화를 확인시켜 준 것이기에 더욱 뜻 있은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각적 표현이나 표상 능력의 내적인 측면을 보다 더 강조한 회화의 깊이와 가치를 확장하거나 새롭게 정립한 것이라 할 것이다. 이미 그동안의 예술사를 통해 충분히 확인하고 검증한 내용들인 것이다. 또한 야수파가 보여준 화풍의 가치는 한편으론 겉으로 드러난 기법이나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혁신적인 변화와 새로움을 추구하려 한 것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회화는 시각예술로서 겉으로 확인되는 시각적 표현을 고려하면서도 작가들이 집중하고 고민한 정신적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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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맥락에서 오채리 작가가 야수주의 화풍을 통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치고 있는 이유와 배경에 대해 관심이 가는 것이다. 이미 잘 알고 있듯 야수파의 작품들은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를 통하여, 단지 대상을 재현하기 보다는 작가의 내면을 표현하고자 하며, 대상에 대한 자신의 의식을 반영하기 위해 왜곡을 통하여 자신만의 미학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로서 표현에의 완전한 자유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이미 이전에 고흐Gogh조차도 “나는 눈앞에 있는 것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대신 자기를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 내 멋대로 색채를 사용한다.”고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밝힌 바도 있었다.

이처럼 야수파 작가들은 기존의 전통적 방식과 달리 자신들의 미학과 주제의식을 창의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원근법이나 명암 등으로 현실을 모사하기 보다는 자신의 개성이나 독창성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형태의 재현에 무관심하였고, 색을 강하게 부각하면서 다듬어지지 않은 방식으로 거칠게 칠하거나 윤곽선을 강조하여 눈(眼)가나 옷의 형태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독창적이고 기존과는 이질적인 화풍으로 그려낸 작품들은 강렬하고 거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놀랍게도 즐거움과 행복감을 전해주고 있으며, 밝고 강렬한 원색들은 가벼우면서도 순수한 감성을 자극하고 있다. 이런 야수파의 화풍이나 영향을 고려할 때 오채리 작가의 경우에도 자기의 개성이나 내면의 예술적 에너지를 분출하기 위해 자신에게 익숙한 기존의 방식이나 분위기를 따르기보다 스스로의 직관이나 내면의 목소리, 욕구에 따라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한 시도로 여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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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리 작가의 앞선 두 번의 전시작품들은 본 적이 없으니, 그간의 과정이나 흐름을 예측하기 어려우나, 이번 전시회 작품들 중에는 2007년에 완성한 것부터 지금까지의 작품들이 함께 섞여 있는 점과 그 화풍이 달라지지 않고 유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 때의 시도가 아닌, 오래도록 매달리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2개 층으로 나뉜 넓은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번 전시작품들은 대부분 야수파의 전시라고 단정해도 좋을 만큼 유사한 화풍이면서 일관된 분위기가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강렬하며 과감한 표현을 내세우는 화려한 색채의 두드러짐은 「마티스(Henri Matisse)」의 전형적인 화풍과 표현의 자유분방함을 연상하게 한다.

오채리 작가는 색채를 통해 자신과 관계되는 대상에 대하여, 보편적인 시각으로가 아닌 자신만의 독립된 기준과 눈으로 미학적인 판단을 하려고 한다. 적색, 청색, 녹색 등의 원색을 주로 사용하며, 대체로 강렬하고 화려하지만, 이를 통해 색이 주는 의미를 정면으로 내세우려 하고 있다. 돌아가지 않고 의도 그대로를 순수하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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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청색의 사용은 그 색이 가진 비중 덕분에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과거에는 청색은 자연에는 없는 색으로 치부되었기에 실제 ‘청색’은 현실에서는 매우 귀한 색이며 성(聖)스러운 색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다. 청색은 밝고 건강하며 안정적인 느낌을 담고 있지만, 피카소는 청색을 비참하고 우울한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였고, 괴테는 청색을 “자아를 매혹시키는 무(無)”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청색은 남성을 상징하며 차고 청명하며 수동적이고 고요한 느낌을 준다.

전시작품 중에는 누드화를 포함 여인의 초상 작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특히 그 여인들은 청색 옷을 주로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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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 블라우스”와 적색의 치마로 코디Coordination한 의상을 입고 있는 금발의 여성 화가를 그린 <그림을 그리는 금발 여인의 초상(작품명 Artist?)> 작품에서 캔버스의 뒷면을 기하학적으로 묘사하면서, 배경은 청색으로, 여인의 머리 장신구와 목걸이 등은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unbalance한 느낌의 채색으로 표현을 시도하면서도 적색, 청색, 황색의 상호보색을 유지하는 것은 작가가 색채에 대해서는 철저한 기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실내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파란색 원피스를 입은 여인’ 은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거울에 비춰서 드러내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자화상을 그리는 이유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위하여 자신의 존재를 타자의 눈으로 확인하여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인식하려는 것일 것이다. 작품 속에서 비스듬한 거울을 통해 청색 원피스를 입은 여인의 모습이 보여 지고, 그리는 대상이라고 연상되는 정물들이 작품의 우측 하단에 배치되어 있으며, 좌측에는 자신의 얼굴인 듯한 초상화(두상) 작품이 그려져 있다. 자화상에 해당할 이 작품은 자신을 여러 시선으로 해체하듯 타자의 시선으로 보여주면서 자신의 존재와 자신에 대한 객관화를 시도해 보려 한다. 그림 속에서 원근법이나 구도는 다소 무시되고 있다. 이 작품 역시 마티스의 초기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자유분방한 채색의 형식을 연상해 볼 수 있는데, 자신에의 인식을 객관화하고 스스로를 타자화(他者化)하여 자신이 스스로를 보려는 시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작품의 바탕 대부분은 주황과 노랑, 보라색으로 채색하고 다른 부분은 현란하지만, 자연스럽게 그리고 다소 거칠게 채색하며, 같은 색을 여기 저기 부분적으로 나눠 칠하면서 작품을 완성한다. 또한 원근법이나 구도, 그리고 요소들의 배치는 제각각인데, 이런 자유분방한 화풍을 통해 작가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어떤 기준이나 원칙(?)에 구애 받음이 없이 그려내려고 한다. 이 작품은 작가가 스스로 자신의 화풍으로 해석해낸 수작(秀作)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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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소파에 앉아있는 청색원피스를 입은 여인> 역시 자화상일 것이다. 작품 속의 배경에는 2개의 그림이, 즉 좌측엔 옆모습의 여인초상이, 우측엔 마티스의 “춤‘을 연상시키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여인의 얼굴과 이목구비는 굵은 선으로 묘사했고, 붉은 입술과 살짝 옆을 향하고 있는 시선은 다소곳하다. 3가지 그림을 하나로 패키징Packaging한 작품처럼 보인다.

또 다른 작품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는 두 여인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작품 역시 야수파의 전형이라 할 만한 인상을 주는 한편, 작가의 표현주의적 성향이 매우 수려하게 드러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색을 중시하는 표현주의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려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개성과 차별적인 탐구노력을 보여주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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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생명나무>는 오채리 작가에게는 매우 상징적인 작품일 것이다. ‘색채화가’로서 그는 단순히 초록과 황갈색만으로 자신의 내면의 깊이를 Impact있게 그려내고 있다. 굵고 상징적인 형태의 나무줄기는 세상의 온갖 (정신적) 사념과 (외적인) 사건을 지탱하고 감당할 듯 힘이 넘치고 든든하다. 또한 색채의 표현에 있어 명암은 최대한 단순하게, 원근감을 최소화하면서 자기가 보는 관점에서의 생명력, 또는 기운 찬 자연의 힘을 보여주기 위하여 군더더기를 제거하여 집중하고 있다. 얼핏 보아도 사실감이나 외형적 미학보다는 작가 내면의 시각과 깊이 있는 통찰을 통하여 이 “생명나무”에 자신의 기운을 담으려고 한다. 따라서 이 나무에 마치 온 자연을 끌어안을 듯한 거대한 포용력과 내적인 에너지가 관통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단순하게 겉으로 보여 지는 자연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측면에서의 자연의 모습, 어쩌면 자연 본래의 모습이기도 할 원천을 그려내고자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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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천을 두른 의자에 앉은 여인>의 누드(Nude)는 정면을 응시하는 전라(全裸)의 여인의 초상이다. 시선은 정면에서 약간 비낀 체이며, 여인의 초록빛 눈동자는 다소 우수에 차있다. 그러나 차분하고 안정적인 분위기에서 한쪽 다리를 포개어 의자에 앉은 여인을 청색바탕으로 그렸다. 청색 바탕색과 초록색 천의 의자, 전라(全裸)인 여인의 피부색 등 3가지 색의 unbalance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청색과 녹색은 피부색과 어느 정도 상호보색 관계가 되니 모델인 여인의 자세와 시선, 그리고 눈빛을 중심으로 은근하며 예사롭지 않게 시선을 끌며 정서적 감흥을 자극한다.

<금발여인의 누드>는 마티스의 <푸른 누드>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푸른 누드>가 풍만한 둔부, 육감적인 가슴을 드러내며 관능미를 부각하고, 윤곽선은 강조되고 있고 채색은 정교하지 못하고 거칠게 표현한 반면, <금발 누드>는 보다 단순하게 살색과 연녹, 황, 청색의 배경색으로 그려냄으로써 여체를 부드럽고 아름답게 살려내고 있다. 따라서 상체에 비해 하체의 둔부 부분이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이지만, 작품 전체의 구도와 균형감이 매우 조화롭다. 또한 옅은 녹색과 노랑, 청색의 강렬한 바탕색은 여성 모델의 관능적인 입술과 시선처리에도 불구하고 편안하고 안정감이 있으니 독자들을 관조하도록 이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강렬한 내면의 정서를 색채와 채색의 조절을 통해 타협하듯 성숙한 관능의 미학을 음미하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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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리 작가는 독자들의 기억에 이미 강렬한 인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야수파의 화풍을 닮은 작품들을 자신의 예술방식으로 수용하고 이를 자신의 독창성으로 재구성하여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듯하다. 한편 이런 화풍을 수용하고 작품으로 재현하는 것이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필자가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이지도 모른다. 회화가 시각적 표현이나 재현을 기본으로 하는 예술 활동이므로 표현에 의미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의 탓일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작가들이 그리고 싶은 것이나 그리는 것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고흐가 말한 대로 “그림 속에서 마음을 달래주는 느낌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그림이나 예술의 몫을 다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지금 오채리 작가는 자신의 예술을 위해 끊임없이 방법을 찾으며 자기의 길을 가는 중일 것이다. 더불어 대상을 자신의 주관으로 해석하여 시각적 즐거움과 만족을 독자들과 함께 느끼기 위하여 자신의 내면을 통해 드러날 색채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강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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