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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갤러리 산책가는 날.38

이형곤 개인전, “무위(無爲)의 풍경II”

by 강화석

이형곤 작가의 개인전이 갤러리 라메르에서 2025년 2/12(수)부터 2/17(월)까지 열렸다. 35번째에 해당하는 이번 개인전에 주제를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작가노트에 <무위(無爲)의 풍경II>라고 한 것을 보니, 작가는 “무위(無爲)”를 탐구하면서 그의 연작을 그리는 중인 듯하였다. 아마 이전에는 <무위의 풍경I>이라는 주제로 전시를 했었을 것이며, 이런 일련의 연장선상에서의 작업이 지속되는 중일 것이다. 따라서 이번의 작품들은 전시의 주제라 할 <무위(無爲)의 풍경II>와 동명(同名)의 연작들이다. 동일한 작품명에 숫자가 부여되어 있고, 임의적인 순번의 숫자들일 것이니 별도의 의미는 없는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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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작품들이 단정하고 정제된 느낌을 준다. 보드(board)지(紙)에 주로 먹(墨)색을 사용하여 바탕을 칠하고, 그 외에 채묵(彩墨)을 간혹 사용하였고, 금분(金粉)을 두드러지게 채색을 한 후 옻칠을 하여 작품을 완성하였다. 게다가 보드지 위에 성긴 천을 덧대어 부친 후 채색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질감은 보기에 따라서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으나, 대개는 친숙하고 부담스럽지 않으며, 추상작품에서의 부수적인 오브제(objet)나 마티에르(matiere)로서의 효과를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이런 제작상의 표현기법이나 재료의 문제가 주목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작가가 천착(穿鑿)하거나 고민하고 있는 주제의식에 보다 주목을 하면서 그에 따른 해석과 시각적 표상에 대한 공감과 이해 차원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작가는 매우 다양하게, 그리고 복합적으로 자신의 작업에 매달리면서 연구하고 깊이 몰두하는 중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으며, 또한 작품들이 어수선하지 않고 철저하게 선택과 집중을 하면서 작업과정에서의 자기 절제와 과감한 압축, 나아가 미학적 탐색에의 고민 등을 매우 은유적으로 또한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무위(無爲)”는 노자사상의 핵심적 사유(思惟)에 해당하는데, 이형곤 작가는 이 주제에 대한 탐구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의도로 “무위의 풍경”에 대한 지속적인 표상을 하고 있고, “유위(有爲)”라 할 자신의 “인위적(人爲的)” 작품들을 통한 사유와 성찰에 몰두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무위(無爲)”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고, 조금의 간섭도 하지 않는 것이며, 자연 그대로 인위(人爲)를 가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인위적 욕심이나 강박을 내려놓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조화롭게 살아갈 때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내포된 의미가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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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번 작업의 출발에 대해 자신의 작업 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의 시공간 위에서 나는 무엇이고 오는 곳이 어디이고 어디로 가는가? 그 물음 이전에 왜 나는 무한의 시공간에서 지금 어떤 이유로 존재하는가? 또 나는 ‘나’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나? ‘나’라는 존재는 실재하기나 하는 것인가? (중략) 띠끌 만도 못한 ‘나’이지만 나는 생각하고 또 그 생각을 쌓을 줄도 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이형곤 작가는 이처럼 ‘자신(나)’에 대한 원초적 질문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질문의 흐름이 다소 두서없기는 하지만 매우 절실한 자기 탐구에의 열망을 담고 있다. 누구든 존재의 본질과 의미를 따지거나 알고자 한다. 이런 근원적이고 원천적인 질문에 대한 해법을 명확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알고자 하거나 알게 된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하여 큰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인간의 고통과 고뇌의 일부라도 해결한 듯 평안해 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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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無爲)는 완전히 ‘수동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간섭하지 않거나,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말하지만, 무위(無爲)란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바가 없이 이루는 것”을 말한다. 반대의 의미로 “유위(有爲)”는 “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 하는 것”이며, “인간이 행하는 인위(人爲)가 대표적인 유위”이다. 이런 가운데, 인위가 지나치면 작위(作爲)로 바뀌는데, 인간의 이성을 기획하는 것이 대표적인 작위에 해당한다고 한다. 아무튼 무위는 “인위를 배제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무위를 따르면 자연의 순리대로 일을 무리하게 처리하지 않으려 한다. 아마도 이형곤 작가는 이런 사유와 성찰을 통하여 그 의미를 깨치려 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행위의 근간으로 삼아 이를 화폭에 시각적으로 표상하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런 시각화는 화가의 필연적 역무이면서도, 자신의 인식을 담아내는 인위(人爲)와 작위(作爲)의 행동이 포함될 수도 있으니 그의 고민의 영역은 넓고 깊어지기도 할 것이라 예상이 된다. 다만 자신의 ‘정신적 사유와 성찰’에 대한 내재적 수행을 전제하며 자신의 사색적 고행(苦行)을 지속하고자 하는 중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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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곤 작가는 우선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와 존재를 인식하는 행위는 상호 대립하거나 모순적 관계일 수 있으니, 이의 명쾌한 터득을 위해서는 깊은 고민을 겪어내야 할 수도 있다. ‘나’와 세상의 모든 대상은 물질이며 현실임으로 각각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원론’적 사고가 요구된다. 즉 ‘나’라는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면, 세상의 대상들이 ‘나’와 상관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해도 그 대상들은 인식의 주체로부터 독립되어 있어야 하는데, 인식의 대상은 인식의 주체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인식론적 입장에서, 대상에 대해 인식작용을 하게 되는 경우 “앎”이 인식을 통해 나타나게 된다. 이때 인식의 주체인 대상이 있어야 하고, 인식의 대상이 인식의 주체로부터 독립된 실체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비의 꿈을 꾸었던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에서 장자가 자신이 ‘나비’인지 ‘자기 자신’인지를 혼동하는 것은, 대상은 현실이고 물질이지만 꿈속에서 보았던 나비는 그렇지 않았다 해도 현실에서의 나비와 꿈속에서의 나비는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곧 이것은 마음속의 인상, 이미지이며 심상(心象)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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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이형곤 작가는 무위에 대한 내적 사색을 통한 심상의 재현을 시도하면서 스스로 무위의 표상을 그려내는데, 그는 의도적으로 바탕과 형상을 서로 대비하면서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이번 전시작품들은 대부분이 먹색의 바탕위에 무위의 대상으로 읽은 자연의 형상들을 금빛으로 또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더불어 그 형상들은 배경의 희생(?)을 통하여 더욱 중심으로서 두드러져 존재하고 있다. 이는 무위가 내세우는 “하지 않으면서 하거나, 자연 상태 그대로”는 아닌 듯이 여겨진다. 다만 그가 읽은 무위에 대한 터득은 그것이 배경(ground)과 형상(figure)의 대비를 통하여 어느 하나가 부각되는 시각적 효과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언밸런스(unbalance)나 대비되는 접근일지라도 결국은 하나이거나 다르지 않다는 반증을 보여주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작업에 대해 작가노트에서 설명한 바 있다.

“마음을 비우고 내 맡김으로써 관조가 가능하고, 더 나아가 관조의 상태마저 넘어서는, 주체와 객체의 간극도 사라지고, 나와 타자(他者), 신과 인간, 물질과 비 물질, 실제와 허구의 경계마저 허물어지고 모든 것이 ‘나’이고, 내가 모든 것이 되는 불이(不二)의 세상, 그러한 근원적 보편의 모습에서 펼쳐져 있는 본래 그대로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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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 사상에서는 미추(美醜), 시비(是非), 장단(長短) 등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보고 있다. 혹시 가까이 다가가 본다면 차이가 있을지언정, 멀리서 본다면 미미한 차이이거나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유무(有無)’도 마찬가지이다. ‘없다는 것(無)’은 천지의 시작이며, 유(있다는 것)는 만물의 어머니라고 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도 세상과 만물의 이치가 둘이 아니라고 한다. 따라서 무(無)는 유(有)라 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가 서로 반대라고 알고 있는 것도 실은 하나라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 밤과 낮, 행복과 불행 등 서로 다른 것이 실제로는 하나, 즉 같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생(生)함이 없다는 이치를 깨치면 멸(滅) 또한 없는 것이며, 이와 같은 불이(不二)란 다르지 않기에 둘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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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곤 작가는 이런 “불이(不二)” 사상에 대한 자신의 내적 사유와 성찰을 자신의 화폭에 담아 시각화하고 있다. 따라서 작품으로 옮겨져 온 대상들은 그의 깊고 넓은 사유의 바다에서 선택한 부분들을 표상한 것이지만 전부를 상징하는 셈이다. 즉, 하나의 화폭에 그가 표상하는 세계를 담았다면, 그 안에 담긴 특정의 의미들이 하나이든 둘이든, 하나의 세상에 속한 일부이면서 전체를 대신하는 의미가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속에 금빛으로 채색한 상징적인 조형 언어가 사람, 즉 나와 타인, 또는 하나 된 나, 그리고 산을 뜻하고, 공간이나 들판, 그곳에 존재하는 대상, 또는 물(水)을 대신하는 것이라 해도, 또한 그것이 하나이거나 둘로 나뉘어 부각되었다고 해도 결국은 하나의 세상에 속하면서 그대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표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작가는 이렇게 조형적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업(業)을 지켜가면서 자신의 존재와 그 존재가 가진 본질과 의미를 새겨보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자신의 참됨은 무엇일까’ 또한 자연이란 스스로 이루어 드러낸 것이라면, ‘자연이란 무엇일까’, 자신이 행하여 만들어내는 결과가 자신의 것인가, 자연의 것인가, 온갖 사고와 관념을 동원하여 스스로의 역할을 해내는 자신의 존재성과 그 세상을 읽어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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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서 이형곤 작가는 무위를 유위(有爲)하듯 채색의 조형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Gold가 주는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지 관심을 끌고 있는데, “황금(gold)”의 의미는 ‘세속적 비유’와 ‘원초적 상징’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는 빛을 의미하는 “조형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것은 작가가 “오롯이 찬란한 빛으로 존재하는 진성“을 인위하려는 주제의식의 발로이면서, 한편으론 “불이(不二)”를 앞세우는 불가(佛家)에서의 ‘금불(金佛)’을 연상시키는 gold칼라를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인위적 강조이니 무위와 배치되는 발상이지만 예술적 상징이나 창의적 표상으로, 또는 금불(金佛)을 연상하는 은유적 채색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무위의 풍경”으로 시각화하려는 작가의 미학적 발상에 따른 자연스런 재현(再現)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강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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