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성숙 기획초대개인전, “Beyond Imagination : 기억의 저
세종대 세종뮤지엄갤러리 B2층 제2관, 2025 4/23(수)~5/4(일)
세종대학교 세종뮤지엄갤러리 2관(B2)에서 채성숙 작가의 기획초대개인전이 2025년 4월23일(수)부터 5월4일(일)까지 열렸다.
“Beyond Imagination: 기억의 저편”이라는 주제를 내건, 필자의 눈에는 매우 심층적 탐구를 추구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림이란 색채와 형태를 통해 보는 이들에게 시각적 지각으로 감성을 자극하는 예술 활동이므로, 이런 느낌은 자연스런 반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다가가서, 그리고 오래 머물면서 바라다보는 그의 작품들은 스스로를 깊은 침잠(沈潛)으로 이끌면서 고뇌를 담아내거나 자아의 내면에 존재하는 내밀한 “무엇”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준다. 다만 전체적으로 자신의 이런 편치 않았을 몰입을 극복하면서 밝고 건강하게 내면의 심상을 해석하고 드러내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동시에 일어나게 한다.
채성숙 작가에게 기억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 지 확인이 필요한 것인가? “Beyond Imagination”, 즉 ‘기억의 저편’이란 주제를 제안하였는데, 그에게 기억은 사람에게 있어 인식과 판단의 근거인 지식이나 앎의 요소들과 더불어 그 이상의 활용성, 즉 창의적이거나 상상적인 뉘앙스nuance를 가진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과 사고체계를 작동하도록 하는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지식의 근간이라 할 기억과 더불어, 창의적인 활동성, 상상력에 따른 삶의 과정에서의 기억에 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작가가 사유의 출발을 이렇게 ‘기억의 저편’이라 정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인식과 지식의 근원은 기억으로부터라고 할 수 있다면, 즉 기억은 본래의 원형질 상태에서 의식과 사고를 행하면서 창의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인간의 기본이라 할 수 있고, 기억하는 모든 것은 인간 스스로 겪어내고 인지한 지식에 근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저마다 존재하며 알게 된 모든 것, 이로 인하여 깨치고 겪어낸 수많은 삶의 모습, 그 속에 담긴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는 총체적이고, 파노라마panorama와도 같이 펼쳐질 셀 수조차 없는 온갖 기억들이 내면에 켜켜이 쌓여 층위(層位)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기억이라는 성채(城砦)를 떠안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작가는 그 ‘기억들의 저편’이 궁금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거대하며 깊이 있는 시도이면서 야심찬 과업을 스스로 떠안은 것이기도 한 것이다. 자기의 현재를 이룬, 그리고 자기를 설명할 수 있는 존재 그 자체의 유무형적 의미의 총합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없을 뿐더러, 끝도 경계도 없는 불가한 탐구의 대상인 기억의 그 뒤편에 대한 궁금함이 왜 일어나게 되었을까?
인간에게는 호기심이나 상상력으로 무한하게 자신의 창의성을 작동하려는 욕구가 있을 수 있으니, 예술가들은 특히나 이런 탐구의 대상을 마다할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자아에 대한 그리고 자기를 지배하고 구성하는 기억이나, 그 실체를 탐구하려는 과업을 떠안게 된다면, 기억의 뒤편까지 궁금해진다는 것은 자연스런 발상이기는 하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Beyond Imagination: 기억의 저편’이라는 주제의식은 자아에 관한 탐색이면서도 그 실체를 보다 심층적으로 알아내거나 재현하고자 하는 의지의 출발일 것이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전시의 주제인 ‘Beyond Imagination: 기억의 저편’은 작가 내면의 심상(心象)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그림의 대상이 구체적이지 않은 무형의 심상을 그려내는 것이므로 작가는 스스로 자유로운 상상에 한없이 빠져들었을 것이다. 작가들은 그림의 대상이 있으므로 그 대상을 재현하기 위한 작가의 구속이 불가피하게 된다. 즉 그 대상에 대한 작가의 인상(印象)을 표상하기 위하여 대상에 대한 의미부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현할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 작가는 대상에 대하여 작가의 심상에 따른 자유로운 표상을 하게 되므로 대상에 대하여 구속 받을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표상하려는 대상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이나, 자유분방한 표현에 따른 무의미성(無意味性)을 펼칠 수 있게 된다. 또한 당연히 대상에 대한 구속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기의 무의식에 의존한 자유, 즉 상상력의 세계를 만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현실과 동떨어진 무의식과 무의미를 쫒으며 자기의 내면이 지향하는 대로 예술적 기교와 재능을 통하여 창의적인 표현을 펼칠 수 있게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과 과정으로 작가는 전시의 주제에 해당하는 「Beyond Imagination」 시리즈를 연작으로, 단일 전시치고는 적지 않은 50여점이 넘는 작품들을 유사한 화풍과 마티에르matiere를 통해 그려내었다.
작가의 전시작품들에는 표현상 일정한 패턴이 엿 보인다. 수평으로 반복되는 선, 숱한 구조의 중첩(重疊)을 연상시키는 수평선의 반복적 표현은 지상 또는 땅의 근원적 표상처럼 보인다. 인간 또는 생명체의 삶의 기반으로서의 상징이거나 그에 따른 무수한 기억의 층위(層位위)를 의미할 수 있는데, 이는 거대한 대상에 대한 작가의 예의적 인식이기도 하다.
또 다른 경우는 수직선의 반복적 표현이다. 수직선은 일어섬, 서있음, 솟아오름 등 삶의 역동적 이미지를 담고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땅(地)과 보다 높은 곳, 즉 하늘로의 연계, 이동, 연결의 시도 등도 연상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생명력이고, 기운이며, 강렬한 활동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Cell을 연상하는 구조적 조형의 나열은 곧 기억의 방이며, 생명의 방이요, 존재의 방일 것이다. 인간에게 존재하는 무수한 기억이나 앎의 사실들은 이처럼 구획되고 선택된 덩어리chunk들, 또는 스키마schema의 연결이라면 이런 스키마들을 담아둔 각각의 작은 세계들을 시각적으로 표상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채성숙 작가의 작품들에서 점을 연결한 선의 형태로서 직선, 곡선, 사선 등 온갖 선들은 시각적 조형요소가 되어준다. 숱한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정의할 수 없는 형태들과 칼라를 화폭에 그려내니, 그것은 곧 어떤 세계의 모습일 것으로 유추하도록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런 상상력과 기억은 실재를 중심으로 충분히 확대해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기억을 떠올리며 그것을 시각화한다면 이러한 표상적 이미지로 드러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작가는 기억의 세계를 해석하고 해체해 보려는 시도로 시각적 요소들을 동원하여 자기가 읽어낸 기억의 세계를 시각적 분석의 실체를 통하여 재현해 내고 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그려보면서, 잔물결이 수도 없이 오고가는 바다를 은유하면서,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지만, 그 끝은 알 수 없는데, 단지 신비하고 아스라할 뿐이다. 보여 지는 이미지는 아득하지만 미지에의 꿈으로 기대와 동경을 불러일으킨다. 사선의 작은 점들은 한편, 짧은 선을 이루며 그것들이 파동의 기운이나, 에너지의 충만함을 화폭에 가득 채우고 있는데, 무한의 공간으로 열려있고, 나아가는 듯하다. 또는 우주의 어느 곳일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 어느 무한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빛과 기운을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시도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막막하고 절망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무언가 숨어 있거나 드러날 것들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듯 보이는 것이다. 그의 시각적 구성과 색채의 전개는 자유분방하지만 질서 있고 차분하다. 한계를 넘어서며 신비함과 오묘함을 주니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결국은 기억속의 세상을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모습들, 그것들은 기억의 개별적인 것들이며, 자신의 생애를 대변하거나 의미화 하는 것들이고, 그것의 근저(根柢)나 지향하는 바의 모습이 기억의 저편에 존재하는 것일 것이라는 작가의 상상(또는 창의성, Imagination)을 시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은 이렇게 기억이라는 무형의 이미지와 형체적 하드웨어hardware를 탐구하고 이해하기 위한 몰두의 소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그의 전시 작품들의 성격을 크게 두 분류로 구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즉 기억에 관한 충실한 이해를 위한 분석과 해체를 통해 기억의 구조적 실체를 스스로 재현하는 작업과 기억에 관련된 스토리, 또는 콘텐츠Contents라 할 기억 그 자체를 표상하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매우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해체한 기억에 관한 하드웨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이를 조형적 미학으로 재구성하여 자신의 예술적 창의성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그의 기억 속을 채우고 있는 무형의 삶의 아름다움과 행복함이라는 인간 삶에서의 추구가치에 대한 심상을 재현해 낸 것이다. 이러한 탐구적이고 분석적인 자세와 행위적 실행을 통하여 그는 매우 넓은 구조 안에서 자신의 예술적 세계를 체계적이고 통합적 관점으로 정리해 낸 것이라 할 것이다.
그의 기억들은 따뜻하고 행복해 보인다. 평화롭게 어울려 있으며, 그래서 조화로워 보인다. 세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상들을 상징하는 다양한 형태들은 곧 자연에서 볼 수 있거나 인간의 삶에 관련된 것들이며, 이것들이 보여주는 모습들은 우리의 페이소스Pathos를 자극하며 빠져들게 한다. 이를 시각적으로 표상한 그의 작품들은 안정되고 차분하기도 하지만 밝고 생기가 있으니 흥을 돋우며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따라서 그의 기억은 분명 시각적으로 드러낸 상징이나 표현적 의미와 일치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것들이 어느 정도 잘 존재하고 보존되어 유지되고 있는 지를 확인하려 하는 것이 그가 작업하는 목적의 하나일 것이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작가는 기억에 대한 구조적 표상을 위한 탐색의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 바탕 위에 자기의 기억 스토리를 연결하면서 스스로의 삶의 가치와 인간적 감성의 소중함을 재인식하고자 시도하기도 하였다. 결국 탐구의 의미는 현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닿아있는 것이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의 많은 작품들에는 이러한 현실의 대상을 표상한 상징과 추상적 표현들이 드러나고 있다. 물론 그것들은 우리의 삶의 현장이나 자연에서 바라보거나 함께 하는 것들이다. 그 기억들은 곧 인간의 삶의 흔적들이며 살아있음의 증거이고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이를 바라고 추구한다. 나아가 다채롭고 화려하고 그래서 빛이 나기를 바라기도 하는데, 작가의 기억이기도 한 삶의 상징적 표상 또한 알차고 부족함이 없이 표현되어 있으며, 나아가 화려하고 흥에 겨워 보이기도 한다. 그의 존재에 대한 이런 솔직한 감성의 표출은 누구에게든 영향을 주거나 새로운 영감을 줄 수도 있으니, 작가 자신의 기억이면서 삶의 체험이지만 예술적 은유와 표현으로서의 의미로 구성하여 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의 표상은 현실로부터의 이탈이거나 구원의 모색이기도 할 것이다. 즉 구원이란 현재의 삶에의 활력이자 의미화를 위한 기본 개념이 될 수 있기에, 작가는 그런 경계를 넘나들고자 하는 듯하다. 또한 작품들은 현실에서는 목도할 수 없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끊임없이 보여주고자 하는 데, 작가의 내면이나 내밀한 자아가 바라는 “구원”의 한 방편인 것처럼, 의미와 무의미사이의 자유로운 교류, 통행을 통해 삶의 저변을 확장해 나가고자 하는 것이며, 이것이 자신이 꿈꾸고 기대하는 “기억의 저편”, “Beyond Imagination”의 도달지점이기도 하면서, 그런 과정을 탐구하고 사유하려는 예술 홛동의 목적이기도 할 것이다. (강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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