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니 강 특별 초대전, “오월의 왈츠” 비채아트뮤지엄 1F
스토니 강 특별 초대전, “오월의 왈츠” 비채아트뮤지엄 1F, 2025 5/9(금)~5/30(금)
서양화가 “스토니 강”의 특별초대개인전이 2025년 5월9일(금)부터 5월30일(금)까지 서초구 방배동에 있는 「비채아트뮤지엄」 1층에서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오월의 왈츠”라는 주제로 스토니 강 작가의 추상작품들을 선보이는 것인데, 전시작품들에는 계절의 정서를 의식한 주제와 무관하게 않게 생동감과 활기가 넘쳐나고 있다.
필자는 작가의 이전 작품들을 본 적이 없었기에 작가에 대한 선입견이나 기본적인 예상조차 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그저 새롭고 신선한 분위기를 감각적으로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작품들에는 작가의 예술적 지향성을 포괄하면서, 자아감(自我感)과 자유로움을 은연중에 표출하려는 내면의 결기가 전해짐을 감지할 수 있었다. 또한 전시 주제인 “5월의 왈츠”는 작품의 전체를 아우르는 수사적 표현으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앞으로 작가가 펼치려는 작업의 방향과 기저(基底)를 암시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즉 “왈츠(Waltz)”는 ‘사랑의 춤’을 상징하므로 세상의 모든 대상과의 ‘달콤한 로맨스’를 꿈꾸며 부드럽고도 감정적인 교감이나, 시간과 삶의 순환을 꾸준히 의식하면서 자기의 감정에 솔직하며 내면과의 소통에 충실하겠다는 암시를 공표하는 것이라 할 만 하였다. 이렇게 에둘러 드러내는 내면의 의지는 작품에 담긴 시각적 메시지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확인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데, 일단 그동안 화가로서의 화업(畵業)에 충실했다는 징표로서 색채의 선택이나 채색의 조화, 그리고 다양한 마띠에르(Matiere)를 다루는 실험적인 시도를 통하여 은근하면서도 명확하게 주제의식을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통 추상작품은 “오토마티즘(automatism)”, 즉 “자동기술법”을 통해 그리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나 즉흥적인 화법을 실험하면서 무의식 혹은 수면(睡眠)상태에서 떠오르는 내적인 충동을 형태로 표현하고자 하는 창작방식으로,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의 “무의식”에 근거한 창작원리이며, 무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우연의 효과를 통해 시각적인 표상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주로 활용한 것이지만, 추상화 제작의 기본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기존의 인상과 인식을 파괴하거나 왜곡함으로서 현실의 존재 대상을 비존재의 것으로, 즉 실재적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현재에 존재하기에 불가능한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의도적인 낯설음을 부각하려는 “데페이즈망 (Depaysement)” 방식도 있는데, 스토니 강 작가는 이런 종류의 표현주의적인 추상작업 방식을 따르면서, 의도적으로 내재 의식을 무의식화 함으로써 자기의 작가정신이나 내적인 통찰을 펼치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필자만의 심증을 가져 보게 되었다. 또한 작가는 이번 초대전에서 자기와 관련된 다양한 모티브를 표상하고자 한 추상작품들을 통합하여 “오월의 왈츠”라는 주제를 내세우고 있지만, 이런 주제의 제안은 단지 계절 감각에 부응하려는 감성적 접근의도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예술의 ‘표상론’을 근거로 스토니 강 작가의 작품들과 그 작품명이 연상하는 작품의 내재한 의미에 접근해 보면서, 분명 그의 작품들은 무의식적 행동에 의존한 우연적인 현상으로 생산한 작품들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즉 “예술작품이 무언가를 표상하는 것이라면, 결코 우연적인 자연현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은 늘 어떤 주체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계획되고 만들어지며, 이것의 제작 의도는 항상 어떤 객관적 대상이나, 작가의 생각, 느낌이라는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반드시 무언가를 보이거나 나타내려 한다. 따라서 예술가들이 무엇인가를 표상하지 않고 우연히 꾸며진 예술작품이란 자가당착적(自家撞着的)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예술작품은 무언가를 구상(具象)한 것이므로 비록 비구상적인 작품이라도 그 작품에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지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예술작품들은 무엇인가를 나타낸 것이며, 예술작품들은 그것들이 나타냈다고 전제한 사물현상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이론가의 주장(‘표상론’,「예술철학」 박이문, pp23~36 참조)을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스토니 강의 작품들은 분명 교묘할(?) 정도로 자기의 작가정신과 방향성에 대한 철저한 계획을 수립해 놓은 것이라는 심증을 갖게 하고 있다. 따라서 스토니 강 작가는 전시 주제 설정에서 조차 분명하게 복선(伏線)을 깔아 놓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추상화 작업이란 의식의 무의식화이며, 체화된 내면의식에 의한 자동적인 표출이거나 우연을 가장한 행위적 표현이라면 작가 스스로 이미 갖추고 준비된 내적 세상의 심상들이 그대로 표상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식과 무의식의 변주를 즐기면서 시각적 도구와 방식으로 자기 언어를 표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따라서 작가는 자기 작품에 담긴 주제들이 이러한 왈츠의 리듬을 연상하면서 교감의 기회가 보다 증폭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전시주제에 연결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이번 전시작품들을 통해 대범하고 과감하게 자기의 내면 의식을 명확히 하면서도 부드럽고 편안하게 전달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왈츠(Waltz)를 단지 즐겁고 흥겹게 남녀간 사랑의 교감이나 나눔의 행위를 상징하는 음악적 모티브이거나 단서로만 삼은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왈츠가 4분의 3박자의 경쾌한 춤곡으로서 ‘강약약’의 삼박자 리듬을 특징으로 하므로 작가는 이를 절묘하게 중의적으로 의미부여한 것이며, 자기의 주제의식을 마치 무의식적 행위로 가장하여(?) 자기 존재에 대한, 또한 육체와 정신의 합일(合一)으로서 자기정체성을 그림을 통해 재확인하면서 의식의 무의식화를 통하여 자기 예술작업의 의미화를 꾀하려는 기획적 사고체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스토니 강 작가는, 시인 폴 발레리가 시를 사유의 방법으로 여기며, 시를 완결된 작품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고가 움직이는 과정”으로 보았듯이, 그림을 통하여 자기 내면과의 소통과 사유, 그리고 성찰하는 방법으로 여기려 한 것이다. 결국 이번 전시를 통하여 작가는 자기 존재, 즉 ‘자아의 성찰’을 통해 의식의 명확성을 드러내면서 ‘사유의 여정’을 거쳐, ‘사고의 확장과 귀환’으로 이어지는 왈츠의 3박자를 의미적 체계로 구성하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필자가 스토니 강 작가의 전시 모티브를 이렇게 크게 3개의 영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작가가 언어 선택에 의식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화가들에게 작품의 이름은 곧 작품의 언어적 모티브이거나 작품에 담아 낼 주제의식일 수 있고, 한편 작품자체의 기본적인 단서일 수도 있으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시각적 재현으로 자기의 내면이나 정신적 심상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실의 문”, “부활”, “청산(靑山)”, “역사” 등의 언어가 주는 개념적 측면은 그 연상하는 바가 특별할 수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것들은 작가에 관한 성찰이거나 정체성과 관련된 개념일 수 있다. 그리고 “빛의 폭포”, “숲의 폭포”, “멜로디”, “꽃의 왈츠” 등은 작가의 사고의 흐름이나 사유과정을 읽을 수 있게 한다. 또한 “바다의 노래”, “바다의 기별”, “정지된 시간”, 그리고 “변증” 등에서 작가가 자기의 내면에 깔린 기억이나 원류(源流)를 의미 있게 여기려 하거나, 자기의 본질적인 바닥을 다지려 할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 던진 화두(話頭)와도 같은 테마(theme)나 모티브(motive)로서 일련의 사고흐름이나 순환적인 질서, 혹은 의식 체계를 연상해 보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을 듯하였다.
“부활”, ”청산“, ”역사“, 그리고 “해운대” 등의 작품에서 스토니 강 작가는 자기의 내면의식이나 시대정신이 반영된 자아 성찰의 모티베이션(motivation)을 제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품 “부활”에는 비장하면서 이성적인 의도를 담고자 하였는데, 종교적 연상과 관련되지만 삶의 진정성이나 자아의 정결함 등을 고뇌하는 결연함이 배어있다고 느끼게 한다. 다소 무겁고 복잡한 분위기가 전해지지만 그만큼 개념의 진중함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십자가를 구성하는 4개의 각기 다른 상징적 표상들을 작가의 내재적 주제로 결합하려 하는데, 한편 객관적인 차원과 주관적인 차원의 콜라주라 할 수 있다. 인류의 정신과 작가의 현재적 의식을 시각적 재료와 방식을 통해 결합하면서, 우연적인 현상으로 재현하려 하는 것이 아닌, 작가의 의도에 따른 재배치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의 아래 영역은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의 영감(靈感)을 배치하면서 작가가 기억하고 의존하는 다양한 인식의 현상들을 제각각 나머지 영역에 결합해 놓고 있다. 중앙에는 꽃이 활짝 개화한 듯한 밝고 화려한 이미지를 중심으로 스토니 강 작가가 투사(投射)하고자 한 정신과 메시지를 전하려 하면서, 현재 매달려 있는 시대인식과 자기정체성에 대한 성찰의 뜻을 바탕에 두고자하였다. 이런 식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기대하는 “부활”의 표상을 통하여 자기 존재의 의미를 재인식하려는 것이라 생각해본다.
작품 ”청산“에서는 험준하고 원시성이 부각된 존재감이 엄연해 보이는 ‘푸른산’이 주는 원초적 이미지는 강인한 힘을 암시하면서 자극하거나 질정(叱正)하는 준엄함을, 작품 ”역사“에서는 사방으로부터 몰려오는 기운이 시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중에, 역동적인 움직임과 화사한 기운이 묘한 불균형적인 조합을 이루고 있으나 거스를 수 없는 존재감은 새로운 통로를 열어 가리라는 결연한 기대를 연상하도록 이끌고 있다. 그리고 작품 “해운대”에서 보여주는 붉은색, 노란색, 그리고 회색의 서로 상이한 색의 원소간의 콘트라스트(contrast)를 통해 발생시키는 특이한 활력(dynamic)은 작가의 의지를 세상에 표출하려는 강한 박자의 시동(始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스토니 강 작가는 스스로 선택한 소재들을 통해 자기의 정신적 모색의 장을 펼치고자 한다. “숲”이나 “빛”, 르네 마그리트를 연상시키는 “마그리트의 창”, “불꽃놀이“ 그리고 ”봄 나들이“ 등 작품의 소재와 주제가 된 개념들은 우리의 삶과 자연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그 속에 내재한 기운과 잠재의식의 원천과 연결을 시도하면서 희망과 기대를 예감하려 한다. 작품 ”숲의 폭포“와 ”빛의 폭포“는 이런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인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 작품들은 작가의 내면적 자아가 펼치는 사유의 놀이, 또는 여정이라 할 만하다.
작품 “숲의 폭포”는 종이(paper)에 아크릴로 채색하고, 또 다른 종이를 오려붙여 콜라주(Collage)하듯 실험적인 방식으로 마띠에르를 활용한 작품이다. 이미 ‘작품명’에서 조차 언어적 은유가 매우 초현실적인데, 작가는 ‘숲’이 상징하는 이미지와 실재가 ‘폭포’의 이미지로 쏟아져 내리는 극도의 내적 이미지 표상을 통하여 현실의 비존재적 이미지를 창조하려는 과감한 무의식적 의식행동을 시각화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현실을 탈피하거나 왜곡하는 등 전혀 새로운 현실의 존재성을 표상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종이라는 물성(物性)이 나무로부터 왔고, 나무는 숲이 안고 있는 것이며, 숲은 거대한 자연의 왕국이기도 한데, 그 ‘숲의 폭포’라는 개념은 일견 부조리한 의미설정이기도 하지만, ‘숲의 폭포’란 숲 안에 존재하고 흐르는 폭포를 지칭하기도 하고 ‘숲’이란 의미어가 ‘폭포’인 기의(記意, signifie)로 표시할 수 있다면 이런 발상 자체는 단순한 개념의 확대가 아닌 숲에 담긴 무수한 것들의 순환을 의미할 수 있기도 한 것이다. 폭포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에너지요 기운이지만 눈에 보여 지는 기운의 흐름이 반드시 그러하지는 않으며 눈에 보여 지는 또 다른 물성으로서 숲의 살아있음을 가시적(可視的) 인식으로 여길 수 있다. 한편 혹시 라도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물이 숨어 있어서 라고 한 언어적 변증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결국 작가는 숲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이런 언어의 시각화로 재현해 내는 것이다.
나아가 작가는 “숲의 폭포”에 각기 다른 원소들을 결합해 놓았다. 콜라주의 복합체인 셈이다. 인쇄된 전지(全紙)를 화판(畵板)으로 삼아 이를 16절로 접지하여 그 위에 아크릴로 채색을 하였으며, 또 다른 종이를 오려 붙이고 이질적인 느낌으로 다시 채색을 하였다. 종이는 색과 물기를 수용하면서 새롭게 몸을 뒤틀어 반응을 하였고, 그러면서 새로운 숲의 세계를 만드는데 협조(?)하며 새로운 초 현실(超現實)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작가는 부조리한 평면위에 서로 어울리지 않을 원소(또는 소재)들의 실재를 콜라주하면서, 이미 작품명에서부터 부조리한 개념을 제시하여 자기의 사유의 깊이와 넓이가 매우 특별하다는 것을 입증하려 하였다. 더 나아가 시각예술로서 보여줄 수 있는 자기의 잠재성뿐 아니라 의식하고 있는 순수한 내재적 주제(Purely inner subjects)를 무의식 화하여 재현하였으므로 이 또한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빛의 폭포”에서는 위로부터 빛줄기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솟구쳐 오르는 기운이 느껴진다. 불이며, 물이며, 바람, 공기인 자연의 요소들이 한데 뒤엉켜 끌고 밀고 당기고 자극하면서 강한 에너지를 만들어 내며 요동하는 중이다. 따라서 순리적으로 흐르기보다 현란한 춤사위처럼 발산하며 퍼져나간다.
“숲”이나 “빛”은 작가의 선택적 표징(表徵)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인간주의적인 뉘앙스(nuance)이면서 솔직한 심상의 징표들이다. 그가 선택하여 부르고 싶은 “멜로디”에 해당하면서 자기만의 “숲”과 “빛”을 표상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도가 상투적이지 않은 이유는 그의 작품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듯이 새롭거나 실험적인 방식으로 재현함으로써 충분히 작가로서의 역무에 부합하는 예술적 행위를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작품 “변증” 역시 “숲의 폭포”와 동일한 태생조건에서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초벌 인쇄된 전지를 16절로 접지한 종이를 화판으로 하여 채색을 하였다. 화판에 기 인쇄된 글씨가 드러나면서 작품에 일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세상의 기본 원소들은 그 무엇과도 관계하며, 결합할 수 있고, 또 영향을 주면서 공존한다. 물론 서로 대립하고 긴장하고 배척하기도 하지만 이런 현상들은 세상을 이루는 기본적인 역학적 원리이며 체계를 따르는 것이다. 작가는 이런 원리의 핵심에 주목한 것인가? ‘숲’의 결합과 조화와 포용과 왕성한 기운을 하나로 묶어 활기를 보여주면서, ‘변증’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공존”과 “함께”를 보여주려 시도한다. 작가의 무의식적 우연의 행위를 통해 드러내려는 추상 작업에서 이렇게 작가는 자기의 의식과 정신을 은연중에, 아니면 노골적(?)으로 보여주려 하였다.
스토니 강에게 바다와 관련된 작품들, “해운대” “바다의 기억”, “바다의 기별”등은 분명 “바다”라는 대상이 포괄하고 있는 자아성의 일부를 드러내려한 의식(儀式)의 행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작품들에 구체적이고 명확히 드러낼 수는 없었더라도, 인간의 사고양태에는 우연적인 것의 작용이 상당하다는 것은 분명한 것이므로 작가는 무의식적으로 “바다”에서 바라보고 체득한 것들을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스토니 강 작가는 마음 깊이 내재한 바다를 떠올리며, 혹은 실제로 바다를 바라보면서 작품 「바다의 기별」을 그렸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바다는 작가의 생애를 시작하면서부터 연원(淵源)처럼 매우 익숙한 삶의 터전이기도 했을 것이며, 그가 가진 숱한 기억에 존재하는 원소와도 같은 것이라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기에, 스토니 강 작가에게 바다는 작가 김훈이 쓴 에세이 「바다의 기별」에서 말한 그 정서를 대신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김훈의 에세이 「바다의 기별」 마지막부분)
지독하게 사랑을 그리는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유사한 기억이나 경험이 없다면 어찌 이런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 스토니 강 작가도 이런 심정으로 「바다의 기별」을 그렸던 것인가에 생각이 미친다. 한편 작품 「바다의 기억」을 “바다의 기별”과 유사한 풍으로 그린 것에 주목해 본다면 두 그림의 공통의 모티브인 “바다”를 떠올리면서, 필자는 김 훈 작가가 “먼 것들로부터의 기별은 젖은 뻘 속에서 질척거리면서 저녁의 빛으로 사윈다” 고 한 말이나, 그리고 김 작가의 간절함은 때론 모호하고 절박하며, 희미하다고 토로하면서도, “그 안쪽에서는 원색으로 강렬할 것이다”라고 한 말은, 곧 스토니 강 작가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고 짐작해 보려 하였다.
삶이란 “바다”와도 같다고 은유할 수 있다면. 고난과 험난함 등 ‘폭풍의 바다’이기도 하고, 안전하고 ‘구원’이 가능한 피난처인 ‘항구’ 이기도 하다면, 스토니 강의 “바다”는 이런 삶의 이중적 세계를 적용한 것이기도 하다. 작가의 주어진 생애에는 후자(後者)의 바다를 포함하여, 늘 바다가 충분히 그의 기억 속에 있었으며, 작가는 그 바다로부터의 “기별”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라는 추론을 해본다. 혹은 이미 도착한 것일 수도 있다.
평론가 고(故) 김현 교수는 말라르메와 랭보를 통해 바다는 <구원>의 과정으로 파악되었다고 쓴 적이 있었다. 혹시 스토니 강의 <바다> 이미지는 역시 <구원>의 상징으로 선택되었거나 그의 마음 속 바탕에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그의 작품 “바다의 기억”과 “바다의 기별”이 배타적이지 않으면서 서로 유사한 세계를 그려낸 것은 기억속의 바다로부터, 그리움의 바다로부터의 기별을 갈망하고 있다는 고백이면서,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바다에 대한 그의 감수성은 녹색의 생기와 분출될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시각적 재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가들의 작업은 자기의 의식이나 내면, 또는 무의식의 세계를 표상하기 위하여 시각적 도구와 방법을 동원하여 드러내는 것이다. 스토니 강 작가는 빛나는 계절 5월을 선택하여 스스로 혼자 추는 춤이 아니라 모두와 어우러져 추는, 그리고 상대와 서로 교감하고 호흡을 맞추며 따뜻함을 주고받으면서, 사랑의 깊이를 공유하는 왈츠를 추고자 하였다. 또한 자기 자신에게 조차 충분히 기회와 여유를 나누면서 긴 호흡으로 자기의 길을 나서고자 하는 의지를 담은심상을 표상하고자 하였는데, 유난히 밝고 빛이 나고 있으니 많은 것들이 어우러져 더욱 경쾌하고 흥겨운 왈츠가 되는 듯하다. (강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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