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상엿보기12.

화양연화(花樣年華) - “꽃다운 시절, 달 같던 생기”

by 강화석

왕가위의<화양연화> 와 김완선의<화양연화>


가수 김완선의 전시회(갤러리마리, 10/15~11/13)를 지난 주 다녀왔다. 김완선이 그림을 그리는 작가인줄을 모르고 있었으니, 나의 흠이랄 수는 없지만 세상사에 대한 관심 밖에 있었던 것은 맞다고 할 수 있는데, “영원한 디바”라고 일컫는 이 대중스타를 호감있게 바라다보는 입장에서 그녀의 전시가 궁금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함께 공동전시회를 열고있는 화가는 실력있는 뮤지션musician으로 알려진 ‘산울림’의 김창훈이었는데, 그는 40년 전 김완선의 가수데뷔 앨범을 같이 만들었다고 하니, 이 두 작가의 인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만하였다. 아무튼 “음악인들이 그림까지 하는가?”할지는 모르지만, 예술의 영역은 수단이 우선하는 것이 아니므로 예술에 대한 원류(源流)가 왕성하다면 어떤 식으로든 표출이 가능한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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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선2.png 김완선의 <인연, 그물> 연작

이미 김완선은 여러 차례 전시를 통해 자기의 작품을 선보인 바가 있었던 듯싶다. 물론 그림은 그림의 내용이나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기본은 시각적으로 재현해 내는 표현능력을 소홀히 할 수 없는데, 상당한 수준에서 자신의 시각적 언어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완선은 <인연, 그물>이라는 제명의 연작들을 전시하고 있었고, 이 작품명은 그가 던지는 작품의 화두이며 주제의식인 셈인데, 그는 우선 자신의 삶에 관한 여러 연결고리들 중에서 사람들과의 인연을 생각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었으며, 그들에 대한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탐구, 그리고 자기가 존재하면서 드러내거나 스스로 인식해보는 자기개념에 대한 몰입 태도를 작품 안에 담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스스로도 대중 스타이지만, 그가 대중 미디어를 통해 소통하는 데 익숙한 탓도 있는 듯, 작품의 주제의식과 모티브motif를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花樣年華)>에서 가져왔으며, 작품의 기본 방향을 “인연의 끈: 김완선과 화양연화의 모티프”로 삼아 자아와 생애에 대한 성찰을 탐색하고자 하고 있다. 김완선은 작품들을 영화 속 이미지와 영화의 메시지에서 영감을 받아 그리고 있는데, 작품에의 완성도나 독창적인 표현 등에 대한 관점보다는 작가가 이를 계기로 자기에 대한 개념이나 내적 자아, 그리고 자기의 생애를 객관화시켜 자기존재에 대한 실존적 인식에 도달해 보고자 하는 의지가 두드러지고 있으니, 이 부분을 주목해 보는 것도 한편으론 의미있는 감상이라 할 것이다.

김 작가가 “인연”을 생각해 보면서 그 인연의 한쪽 주체인 자기와 상대와의 관계를 살펴보고, 그 사이에서 자기가 겪어온 생애(짧지 않은 세월이다. 자기의 나이뿐 아니라 가수로 살아온 세월이 40년이니 감회가 특별할 수도 있는 것이다.)를 스스로 바라보는 것은, 그리고 일반인이 아닌 대중적 명성을 가지고 산 삶을 어찌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생각한다면 보다 많은 생각에 휩싸일 법한 것이다. 따라서 그 단초(端初)로서 대중의 지지와 갈채 속에 살았던, 삶의 속살이나 스스로가 감당할 내면의 고백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자신에게 익숙한 대중미디어 속 이미지에서 자신을 비춰보려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기 때문에 영화 <화양연화>의 메시지에서 매우 근접한 모티브Motif를 찾았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이번 전시의 공통주제는 “Art Beyond Fame”이다.


“화양연화(花樣年華)”의 뜻이 “꽃처럼 아름답고 빛나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 하지만, “왕가위”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 남녀간의 사랑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의 애화(哀話)를 특유의 영화적 예술과 미학적으로 해석해 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속 스토리는 안타깝고 불안하고 갈등하면서 가슴조이고 슬퍼하는 것을 주로 보여줄 뿐이기에, 그리고 결국 서로 헤어져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는 결말을 보면서 어찌 이를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빛났던 시절의 스토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또한 이 영화를 만들 당시 왕 감독은 40세를 막 넘긴 나이에 이르고 있었고, 영화 속 남녀주인공의 나이를 짐작해 보면 대략 40세를 전후한 시기일 것으로 추측한다면, 나이와 상관없이 생애 중에서 화려하고 빛났던 시절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어느 정도 원숙해져 가는 나이대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 겪은 에피소드를 통해서 ‘화양연화’의 의미를 읽어 내기에는 다소 복잡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영화를 들여다보려는 것이 드라이dry하고 평이한 만연체적 발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영화속 두 남녀가 고민하고 갈등하며 실행하지 못하고 주저하면서, “자기들은 남들과는 다르다”는 도그마dogma에 갇혀 있는 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면서 재밋거리라고는 없는 도덕적 관점이라 할 수 있기에 예술적 상상력과 감흥적 스토리텔링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에 빗대어 본다면, 매우 비인간적인 발상이요 김새는 구성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내내 고뇌하듯 갈등한 모든 것이 윤리와 도덕률을 따르느냐, 자기의 감정에 충실하느냐에 대한 갈등이요 긴장이었던 것이라면, 어차피 이 영화의 대 전제는 어떤 규범이나 도덕적 기준을 앞세운 인간적 고민거리가 대체적인 스토리의 흐름이요 전체적 짜임인 셈이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글 자체가 멋대가리가 없이 굳이 쓰려는 목적조차 흐릿해 지는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가위는 영화의 본질에 충실하고 있다. 그가 자기의 고유한 스타일대로 자기만의 메시지를 고고하게 던지면서 특유의 필모그래피filmography를 쌓으며 강렬한 영향력을 내뿜는 이유가 이 영화에서도 유감없이 발휘가 되고 있는 것이다. 현란한 카메라 워크camera work를 통해, 이전에 이미 선보인 영화 <중경삼림>이나 <타락천사>에서처럼 시대적 상황과 인간의 심리를 고스란히 담아내면서 보는 이들을 쥐고 흔드는 수법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영화문법을 통해 대중들의 심정을 대신함으로써 함께 공감하거나 교감하면서 위로가 되기도 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시대의 공허함을 채워주었던 그 치유의 효과가 이 영화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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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51118_192302921.jpg 영화 <화양연화>의 장면 캡쳐

왕가위는 좁아터지고 누추하지만 왠지 서민적이고 인간적인 1960년대(1962년)의 홍콩 도심의 아파트에 우연하게도 같은 날 이사를 온, 애 없는 두 젊은 부부사이에서 벌어진, 인간사회에서는 흔하디흔한 불륜을 소재로 스토리의 원천을 삼고 있다. “많은 일들이 나도 모르게 시작”되는 법이다, 영화에서는 뒷모습만 몇 번 비춰주었을 뿐인 이웃집 남녀가 언제부터 그런 관계를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그 불륜스토리가 아닌, 그의 피해자들인 각각의 배우자들 간의 또 다른 관계에서 벌어지는 스토리를 중심으로 전개한다. 웬만하면 단번에 그 흐름이나 결말을 예측할 만하지만, 왕가위는 이를 자기의 영화로 풀어헤쳐 나가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렇기에 많은 (영화를 볼 줄 아는) 관객들이 그것에 주목하면서 다른 이야기로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은 “도덕이냐, 인간의 감정이냐에 대한 갈등 아닌가?”라는 식으로 단순히 매도할 스토리텔링이지만, 지금도 “화양연화”는 서양식의 “리즈(Leeds)시절”이라는 명쾌하고 단순한 말보다 우위에서 압도하면서 우리의 기억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인데, 아무튼 왕가위는 늘 자기의 영화를 이런 식으로 비틀어 즉시적 대응이 아닌 방식으로 스토리를 풀어나가면서 “다르게”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으며 자기식의 메시지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 영화가 2000년 5월에 “칸 영화제”에서 대중에 처음 선보였으니, 그의 20세기 마지막 작품에 속할 테지만, 그 이전 작품들이 홍콩의 중공 반환에 따른 사회적 문화적인 불안 심리를 대변하였듯이 이 영화역시 그런 기류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다. 따라서 무언가 있어 보이고, 또한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다른 부류의 감정을 끄집어내어 스토리를 엮어 풀어내려는 영상언어의 마술사답게 그저 허접하고 유치할 뻔한 소재의 스토리를 관객들이 숨죽여 몰입하듯 영상미에 빠지게 하였으니 이런 대단한 장악력을 어찌 소홀히 대할 수 있겠는가 싶다. 또한 오늘날 “내로남불”은 못마땅한 말이 되어 버렸지만,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수준에 머무르진 않기에 매우 신중하게 영화를 관찰하고 탐구하듯 보는 것이 맞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감독이 도처에 걸어 놓은 장치들은 영화아카데미의 교본에나 나올 법하게 매우 특출한 의도를 전달하고 있다. 카메라 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의 노력만큼이나, 미술감독 “장숙평”의 심미안은 매우 놀랍다. 영화 내내, 두 남녀가 겪는 심리적 갈등이나 내면에서의 감정절제 노력을 담기에 적절한 클로즈업 샷과 투 샷, 그리고 대비되는 와이드 샷을 오래 잡아 유지하는 카메라의 시선처리와 더불어 화면 안을 채우는 색채의 아름다운 조화가 매 씬scene마다 철저한 준비와 검증을 거치면서 “영화는 영상”이라는 기본적인 답안을 잘 지켜내고 있는데, 예상되는 단순한 일상을 기대감을 가지고 지켜보게 한다. 또한 화면마다에 담긴 감각적 메시지들은 의미해독을 유발하는 지독한 관여도를 관객들로 하여금 즐기게 하고 있다.

한편으론 이런 불편한 영화적 설정과 감독의 리딩leading이 짜증이 날 수도 있다. 영화를 소비적 문화콘텐츠로 보면서 영화 속에 빠지려 한 관객들을 시간적, 장소적 거리를 유지하도록 철저하게 계산하면서 영화에 동화와 대조를 얽어 짜며 긴장상태를 고착화하도록 하는데, 따라서 관객은 제3자인 관찰자로서 영화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그들의 진지한 노력을, 그리고 “다른 이들과는 다른” 또는 “나는 너 같지 않다.”는 사고와 행동을 구성하고 행하는 과정들을 그대로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기획적 의도를 추구하려 한다. 이런 가볍지 않은 의도가 오히려 스토리의 흐름을 지루하지 않게 해주거나 색다른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이다.

클로즈업 샷으로부터 카메라가 빠지면서 와이드 샷에서 롱샷으로 이어지는 긴 화면흐름의 스탠스를 지켜보면서, 그것이 배우들의 뒷모습일 때, 그리고 순간 암전되거나 장면이 멈춘 듯, 화면이 사라지는 전환효과들을 통해 관객들은 잠시 주춤할 수도 있을 테지만, 곧 동시에 앞과 뒤로 이어지는 스토리의 구성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여운과 기대감으로 지루함을 느낄 틈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때론 ‘치파오’를 입은 “첸부인(장만옥)”의 실루엣과 천천히 슬로우 모션으로 국수를 담은 마호병을 든 채 걸어가는 수더분한 언밸런스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매혹적인 그녀의 뒷모습에 젖어드는 것은 영화보는 즐거움의 보너스같은 것일 것이다. 그리고 실내에서의 제한된 앵글angle과 부족한 듯한 조명은 화면에의 집중도와 긴장감을, 또한 프레임frame 밖으로 부터 돌발적인 무언가의 등장을 예상하도록 자극하면서 디테일detail하며 세심하고 기교적인 연출력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주된 장면들을 담고 있는 세트set들이 몇 개 되지 않음에도 매우 자연스럽고 색다른 감정을 갖도록 하는데, 이것 역시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이 매우 단순할 지라도, 매 씬 마다의 영상에 담긴 의도가 그대로 의미적 메시지처럼 확장적이면서 창의적인 해석을 유발한다. 따라서 매우 어렵고 심각한 긴 이야기의 터널을 지나온 것처럼 보는 이들의 감정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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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51118_192216851.jpg 영화 <화양연화>의 장면 캡쳐

영화 속에서 주요장면의 배경이 되는 아파트 실내, 건물을 끼고 있는 도로변, 노점으로 가는 길과 계단, 한쪽 벽이 붉은색의 천으로 휘장처진 호텔 복도와 호텔 방안 등, 불과 몇 개 되지도 않는 이 장소들에서 수도 없는 갈등과 고민, 스스로의 치유, 자기 위로,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생겨난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 그를 극복하거나 감추거나 하면서 결국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들과는 달라야 하는 강박증 사이에서 힘들어 하고 슬퍼하였던 시퀀스sequence를 만들어 내었는데, 영화가 할 수 있는 충분한 내적 인프라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소들에서 두 남녀는 어떻게 자기들의 배우자들이 시작하게 되었고, 일본으로 떠난 두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떠올리면서 때론 그들의 입장에서 가능했을 대화를 흉내 내보거나, 그 사이 가까워진 두 사람사이를 염려하면서 자기들은 그들과 다르니 그들처럼은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헤어지는 연습을 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막상 헤어진다는 사실에 서러움이 복받치는 상황에서 서로를 달래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통해, 어느 사이 이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 것이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확인시키게 되어 버린다. 영화의 진행상 예정된 이런 시퀀스들을 종합해 보면서 서서히 왜 이 영화가 “화양연화”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인생의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이란 결국 이루고야 만 순간과 곧 이어지는 허무감이 아닌, 이룰 수 있는 순간까지의 과정에 있고, 어쨌든 도달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을지언정 그 순수하고 진실했던 그 감정을 느껴볼 수 있었던 것이 아름다운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관객들은 영화 속에서 읽을 수 있는 다양한 미장센mise en scene을 통해 영화와의 교감이나 공감을 하며 부수적인 즐거움을 배가해 볼 수도 있다. 첸부인(장만옥)이 입은 “치파오”(만주족 고유의상을 개량)의 칼라와 영화 속에서 소품들의 칼라는 장숙평 미술감독의 절묘한 장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첸부인(장만옥)의 치파오 색깔의 변화는 시간의 흐름을 읽는 장치이면서 그녀의 내적 심리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숙하고 우아한 느낌이 묻어나는 헤어스타일과 치파오를 입는 패션스타일은 언제나 똑같다. 집근처 노점으로 국수를 사러갈 때에도 치파오를 예쁘게 차려입고 다녀오는 첸부인(장만옥)은 다만 옷 색깔의 변화를 통해 다름을 알 뿐이다. 따라서 옷의 달라진 색깔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그 날의 심리나 행동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아마 호텔복도의 붉은 색 휘장이나, 침대시트와 붉은 색 치파오는 서로 상관이 있을 것이다. 주로 녹색의 치파오를 입을 때는 그녀의 내면의 욕구가 반영되는 듯하고, 브라운 칼라를 입을 때는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따라서 주인집 식구들이 외출한 틈을 타서 첸부인이 차우의 방에서 차우가 쓴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던 중, 예정보다 일찍 식구들이 귀가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차우의 집에 갇혀(?) 숨어 지내야 했을 때, 차우의 방 침대 시트는 짙은 붉은 색이었으며,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치파오를 입고 있는 첸부인이 빨간색 시트를 덮어 다소 요염한 자세로 누워 있던 장면에서는 묘한 긴장감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만 같은 분위기를 관객들은 느꼈을 것이다. 결국 영화 내내 두 주인공은 자신들의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행동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렇게 암시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듯 말 듯 암묵적 단서와 분위기를 지속함으로써 은근한 기대감(?)을 유발하고 있었다. 결국은 이 영화는 드러내놓고 두 남녀가 자신들이 사랑한다는 의사나 행동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이것이 자신들이 남과 다르다는 차이를 확인하는 것인지는 모르나, 이미 도처에서 이런 유발가능성이 높은 단서들을 풀어 놓고 있는데, 이러한 미장센은 이 영화의 기본 장치에 해당한다.

영화는 시대적 배경으로 1962년과 1963년, 그리고 1966년을 보여준다. 1962년에 만나 겪은 그들의 스토리는 1년 후인 1963년에 잠시 이어지는 듯 했다. 결국 헤어지고 만 두 사람은 차우(양조위)가 싱가포르로 떠나 아내와도 헤어진 채 홀로 지내는 가운데, 1년 후 첸부인(장만옥)이 싱가포르의 차우의 방에 몰래 들어와 잠시 홀로 머물다 돌아간다. 그리고 3년 후, 다시 예전 살던 주인집을 찾아온 첸부인은 얼마 후 어린 아들과 전에 살던 집으로 이사와 살게 된다. 이때 첸부인의 헤어스타일은 예전과는 다르게 풀어헤친 중간 길이의 단발머리형태이며, 약지에 낀 반지가 사라지고 없는 상태이다. 아마 첸부인도 결국 남편과 헤어져 어린 아들을 키우며 살게 된 모양이다. 그리고 얼마 후 차우 역시 자신이 살았던 옛집의 주인을 찾아오게 되는데, 첸 부인은 이미 이사와 살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차우는 그 집 방문을 쓸쓸히 바라보다가 떠난다. 이렇게 “그때 그 시절은 지나갔고, 그때의 모든 것은 사라져버린 것”이다.


김완선은 남녀간의 사랑을 테마로 “화양연화”를 시각화하려 한 것은 아닐 테지만, 생애를 통해 이렇게 우연같은 인연으로 맺어지는 삶의 모습과 그 사이에서 더 발전하였거나 갈망하였던 것들이 이루어지거나 결말에 이르지 못했던 것들을 두루 회상해 보면서,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신이 스스로 내면으로부터 보여준 진정성이나 진실한 마음과 태도를 돌아보면서 결실이 아닌, 과정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읽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또는 대중들의 사랑을 맘껏 받았어도 그 환호와 인기 속에 담긴 슬픔은 자신이 “스스로 자기를 사랑했던 나르시스”처럼, 또는 자신을 “타자화”하여 자기의 존재를 인식하려 한 것처럼 김완선 역시 인연의 끈을 생각해 보면서 자기개념을 확인하거나 자기존재를 스스로 되돌아보려 한 것이었을 것이다.(강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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