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간을 담고 인생을 담는 추억,

부제 : 21세기에 만학 이야기를 전하는 20세기 샐러던트

by 강효숙

93. 품격

품격은 겉모습의 단정함이나 말투의 세련됨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 곧 사람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조용한 힘이다. 말이 적어도 무게가 있고, 소유가 적어도 마음이 넉넉하며, 성공이 커도 교만하지 않고, 실패가 깊어도 무너지지 않는 것- 그것이 품격이다.

품격은 배움으로 다듬어지지만, 고난 속에서 완성된다. 화려함 속에서가 아니라, 흔들리는 순간에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려움 속의 사람의 민낯을 드러낸다. 경제적 궁핍, 관계의 단절, 질병, 실패.

그때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원망할 것인가. 어려움 속의 품격은 억울함을 삼키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내는 자세에서 빛난다.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을 비하하지 않으며, ‘그래도 나는 나의 길을 걷겠다’라고 말하는 담담한 결의. 비가 오는 날 우산을 들고 서 있는 사람처럼 젖어도 흐트러지지 않는 태도, 그것이 고난 속의 품격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품격은 완벽함이 아니라 솔직함에서 나온다. ‘제가 아직 많이 배워야 합니다.’ 이 한마디가 비굴함이 아니라 성장의 의지로 들릴 때, 그 사람에게는 이미 품격이 있다. 변명하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 부족함을 숨기려 애쓰기보다, 그 부족함을 통해 더 나아가려는 태도- 그 겸손이 곧 품격이다.

재산과 지위는 사람을 드러내는 도구일 뿐, 그 자체가 품격은 아니다. 지정한 부유함의 품격은 자신의 풍요를 타인의 결핍을 채우는 데 사용하는 마음에 있다.

높은 자리에서 낮은 사람을 내려다보지 않고, 권력을 말로 과시하지 않으며,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은혜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겸허함.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이를 존중할 때, 그는 비로소 진짜 부자가 된다.

세상은 종종 위치로 사람을 평가한다. 그러나 낮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품격까지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면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작은 가게를 지키면서도 얼굴에 당당함이 있으며,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감사함을 앓지 않는 사람. 자신의 가치는 환경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있음을. 낮은 자리에서 의연히 서 있는 모습은 어떤 왕관보다 많이 빛난다.

품격은 말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더 깊은 품격은 침묵에서 드러난다. 화를 내고 싶은 순간에 말을 아끼는 절제, 자랑하고 싶은 순간에 조용히 미소 짓는 여유, 상처받았어도 품위를 잃지 않는 절도. 품격은 소리가 크지 않다. 오히려 고요하다.

세월은 얼굴에 주름을 남기지만, 품격은 그 주름을 빛으로 바꾼다. 젊음은 열정으로 빛나지만, 노년은 이해로 빛난다. 많이 겪는 사람이 많이 아는 체하지 않고, 오히려 더 부드러워질 때- 그것이 인생의 완성된 품격이다.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은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빛이 비치지 않는다는 뜻일지 모른다. 좌절감은 마음을 얼어붙게 한다. 계획은 무너지고, 자신감은 사라지고,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하루를 정직하게 살아내는 것,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안고도 조용히 다음 날을 맞이하는 것. 희망은 환한 미소가 아니라 ‘그래도 나는 오늘을 버틴다’라는 결심 속에서 자란다. 그 결심이 곧 품격이다.

고독은 사람을 벗겨낸다. 곁에 있던 이들이 떠나고, 이해받지 못하는 시간이 쌓일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과 마주한다. 고독 속에서 품격은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외롭다고 해서 아무 관계에나 기대지 않고, 상처받았다고 해서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며, 혼자라는 이유로 삶을 대충 살지 않는 것. 고독은 비참함이 아니라 자기 성찰의 방이 될 수 있다. 그 방 안에서 눈물 흘리되,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 그것이 고독 속의 품격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날도 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노력해도 결과가 없고, 사람도 상황도 변하지 않을 때, 그때 필요한 것은 거대한 확신이 아니라 작은 믿음 하나다.

‘지금은 이해되지 않아도 이 시간이 나를 망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절망 속에서도 마음을 완전히 닫지 않는 태도, 비록 미약해도 선함을 잃지 않는 선택, 냉소 대신 침묵을 택하는 절제.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자기 영혼을 더럽히지 않은 것, 그것이 가장 깊은 품격이다.

밑바닥은 낮은 자리가 아니라 모든 것이 벗겨진 자리다. 체면도, 자존심도, 자랑도 사라지고 오직 ’나‘만 남는 자리. 그 자리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선택은 비틀어지지 않는 것이다. 세상이 나를 밀어냈다고 해서 나까지 나를 밀어내지 않는 것. 가난하다고 해서 마음조차 가난해지지 않는 것. 밑바닥에서의 품격은 누가 보지 않아도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 작은 약속을 지키고, 작은 일에도 성실하며, 타인을 향한 최소한의 배려를 잃지 않는 것.

좌절은 우리를 낮은 곳으로 데려가지만, 그곳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깊이는 달라진다. 빛이 없는 자리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것, 고독 속에서 도 품위를 지키는 것, 희망이 없어 보일 때도 영혼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밑바닥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품격이다.


가장 아름다운 품격은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순간에도 ’ 나는 여전히 살아갈 가치가 있다 ‘고 조용히 말할 수 있는 용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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