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집중호우에 10여 마리의 소들이 '사성암'이라는 절로 피신했다고 한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굳이 '소들이 절로 간 까닭'을 알고 싶다면 사찰 장식 중에 하나인 '십우도(十牛圖)'를 살펴보면 연관 지을 수 있을 듯싶다. 십우도는 심우도(尋牛圖)라고도 불리는데 이름이 두 가지인 이유는 그 의미와 그림의 표면을 보고 이름 지었기 때문이다. 먼저 심우도(尋牛圖)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찾아간다'라는 의미이며, 이때 인간의 본성에 비유한 것이 소이다. 즉 소를 찾는 그림이 인간의 본성을 찾는 그림인 것이다. 십우도라는 이름은 열개의 그림을 소를 주인공으로 했기 때문에 주어진 이름이다. 그래서 십우도(十牛圖)와 심우도(尋牛圖)는 같은 그림을 일컫는 말이다. (이하 십우도(十牛圖)라고 표기한다.)
십우도(十牛圖)는 주로 사찰 법당의 대웅전 외벽에 벽화로 많이 그려진다. 인간이 본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거친소를 길들이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선화(禪畵)의 일종이다. 십우도(十牛圖)는 언어와 어떤 이론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부처님이 가르친 언어 밖의 의미를 되새겨 사람 마음의 실상을 찾아 바로 부처가 되는 것을 이상과 원리로 삼는 선의 종지를 담고 있다. 화면의 전개는 점수(漸修)의 과정, 즉 차례대로 수행단계를 밟아 서서히 높은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십우도의 원류는 중국 송나라 때 만들어진 보명의 목우도(牧牛圖)와 확암의 십우도 송(十牛圖頌)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까지 이 두 유형이 함께 그려졌으나 근래에 와서는 대체로 확암의 것이 많이 채택되고 있다. 범어사 보제루에는 보명의 목우도가 채택되어있기도 하다.
나는 8월 30일 사성암을 찾았다. 오랫동안 불교에 몸담아왔던 습관 때문에 이동 중에 가까운 절이 있으면 들려서 108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소들이 사성암으로 피신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꼭 한 번 사성암에 가보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또한 나 역시 본성을 잃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나마 돌아보고 반성의 시간을 가지면서 나의 본모습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또 소들이 사성암을 찾은 이유를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완도에 가는 길을 조금 돌아서 사성암에 들렀다.
구례 화엄사의 말사인 사성암은 화엄사의 명성 탓인지 전에 화엄사를 몇 번 갔으면서도 사성암을 들른 기억은 없었다. 사성암 네비를 찍고 안내하는 대로 찾아가니 커다란 주차장에서 안내를 멈춘다. 그곳이 내가 찾아온 사성암의 주차장 이려니 하며 차를 세우고 살펴보아도 절은 보이지 않고 셔틀버스들이 몇대서있다.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셔틀버스 기사분이 안내를 하고 있었다. 그 버스를 타고 가는 거라고 하여 서둘러 왕복 티켓을 사고 버스에 올랐다. 잠시 후 출발한 버스는 산길을 구불구불 돌아서 올라간다. 버스가 출발하자 마치 그날을 재현이라도 하려는 듯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다. 가파르게 굽어진 길에 소나기까지 내리는 길은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10분이 채 안되어 도착한 사성암 주차장은 급경사에 협소하기까지 해서 차를 가지고 왔어도 불편 할 뻔했다. 주차장부터는 다시 100 미터 정도의 길을 걸어야 한다. 걸어가는 길은 경사가 심하여 숨이 찼다. 차로 10여분을 오르고 다시 절마당까지 100 미터 정도의 길을 걸어야 도착하는 사성암 유리광전 앞까지 소들이 쉬지 않고 왔다 하니 어떤 의미를 자꾸만 부여하게된다.
사성암은 주불이 약사여래 부처님으로 모든 중생들의 몸과 마음의 병마를 물리쳐주는 부처님이다.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의 암각화 유물로 추정하는 가파른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부처님이다. 이 마애여래불을 보호하기 위해 팔작지붕의 건물을 세우고 그 건물의 이름을 유리광전(琉璃光殿)이라 하였다. 현세 부처님이신 석가모니를 모시면 대웅전(大雄殿)이라 하고, 아미타 부처님을 모셨으면 극락전(極樂殿)이라고 하며,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면 비로전(毘盧殿)이 된다. (대체로 그러하나 유리광전을 약사전이라고도 하고 비로전을 대적광전이라고도 하며 몇 분의 부처님을 모셨는지에 따라 ㅇㅇ보전(寶殿)이라고 쓰기도 한다.) 여러 부처님을 모신 전각의 지붕은 대부분 팔작지붕에 다포형식으로 웅장함을 강조하게 되는데 사성암의 유리광전은 절벽이라는 위치 때문이었는지 다포형식은 갖추지 못하였지만 어느 곳 못지않은 웅장함과 화려함을 뽐내며 절벽에 솟은 듯 세워져 있다.
사성암 유리광전의 내부모습은 촬영할수가 없습니다. 이번엔 코로나로 인해서 출입까지 차단하고 있더군요 유리광전 아래로 조성된 약사여래불만 찍어보았습니다.
30분 간격으로 운행하고 있는 셔틀버스가 관광을 마치고 하산하려는 분들을 태우러 올라오는 모습입니다.
사성암 유리광전의 전경과 안내판입니다.
사성암을 돌아보며 소들이 이곳까지 어찌 왔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신기한 건 소들이 오르면서 숨이 차기도 했을 거고, 얼마든지 풀의 유혹에라도 빠져 멈추거나 옆길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곧바로 유리광전 아래까지 가서야 멈추었다는 것이다. 유리광전에 계신 약사여래 부처님께 건강을 보호해달라는 기도라도라도 한 것일까?
사성암은 거친 바위를 의지 삼아 아래쪽 공간은 석축을 쌓아서 다듬고 계단식의 터를 만들어 여러 개의 전각을 세웠다. 주불을 모신 유리광전 왼쪽으로 나한전과 지장전이 있고 지장전 위쪽으로 산신각이 있다. 지장전과 산신각 중간쯤에 소원바위가 있는데 그곳에서 소원을 빌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주신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소들도 소원바위의 영험한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절을 찾을 때는 소원을 빌기보다는 내 마음을 다스리고 세상에 교만해지려는 마음을 부처님 말씀을 읽으며 다독이고 돌아왔었는데 오늘은 소원바위를 보면서 세속적인 소원기도를 하고싶었다. 내게도 노력하지 않아도 기도만으로 형통하게되는 소원 한 가지 들어달라는 기도를 하고 왔다. "부처님이시여 세상에 만연하고 있는 인간성의 상실을 뒤 찾게 하시고 모든 이의 마음에서 이기심을 거두어주시고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하소서! 개인적으로는 우리 가족 언제나 화합하게 하시고 항상 건강하며 만사형통하게 해 주소서 나무 약사여래불 나무 약사여래불 나무 약사여래불()()()"
어쩌면, 소들이 그 먼길을 오르면서 기도를 했다면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은 그런 기도를 해보았다.
나는 아직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기에는 너무도 미약한 존재이므로.....
소원바위, 많은 사람들이 소원쪽지를 달수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도 한장 적어서 달았지요.
바위에 미소 짓고 계신 부처님이 얼굴이 보이시나요? 저 부처님의 미소를 보아야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혹시 가시게 되면 꼭 친견하고 오시길 권합니다^^
사성암에 올라서면 아래로 겹겹이 둘러싸인 산들이 내려다보이고 섬진강의 유려한 풍경도 볼 수 있습니다.
사성암의 전각에는 벽화가 없었다. 벽화가 없으니 십우도는 당연히 없었다. 인간의 본성을 찾으라는 가르침을 주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지 않아서 일 것이다. 대체로 십우도는 대웅전에 그려지기 때문이다. 소들로 인해 머지않아 대웅전을 세우고 멋진 십우도가 그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된다면 소들의 이야기가 사성암의 새로운 전설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소를 상징으로 하여 인간 본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십우도를 살펴보자.
1.심우 (尋牛) <소 찾기> 2.견적 (見跡) <자취를 보다>
3. (見牛) <소를 보다>
4. 득우 (得牛) <소를 얻다> 5. (牧牛) <소를 길들이다> 6. 기우 귀가 (騎牛歸家) <소 타고 집에 오다>
1. 자기의 본래 마음자리인 소를 찾아 나서는 심우 (尋牛) <소 찾기> 푸른 들판 끝이 없네 깊은 풀숲 헤쳐가며 소를 찾아 헤매는 길
이름 없는 강물 따라 머나먼 산길 따라 기진맥진하였건만
소는 감감 보이지 않고 땅거미 진 숲 속에 귀뚜라미만 홀로 우네
2. 소는 아직 못 보았으나 소의 발자취만 발견하는 견적 (見跡) <자취를 보다> 문득 강가의 나무 밑에 소 발자취 보이네
아니 향기로운 물 밑에도 소 간 자국 뚜렷해 저 멀리 이어져 가네
이제야 나의 코 보듯 그 자취 분명하여라
3. 소를 발견하는 견우 (見牛) <소를 보다> 두견새 노래 들려오고 따스한 햇살 아래 바람도 잔잔한데
강기슭 버드나무 마냥 푸르네 여기 어느 소(牛)인들 숨을 수 있을까
저 육중한 머리 저 장엄한 뿔 무슨 재주로 끌어내랴
4. 본래 마음자리를 비유한 소를 얻는 득우 (得牛) <소를 얻다> 그 싸움 어려웠어도 내 마침내 소를 잡네
그 억센 기질 구름 위로 솟을 듯하고
그 한량없는 힘 태산도 뚫으려는가
그러나 마침내 멈추었구나 오랜 방황을 멈추었구나
5. 소를 길들이는 목우 (牧牛) <소를 길들이다> 채찍과 밧줄이 있어야겠네 고삐 꿰어 손에 잡고 회초리질 아니하면
그 소 멋대로 날뛰어 흙탕 수렁에 빠지겠구나
그러나 잘 길들인다면 본성이 어진 소라
고삐 없이도 나를 잘 따르리
6. 소를 타고 본래 마음자리를 비유한 집으로 돌아오는 기우 귀가 (騎牛歸家) <소 타고 집에 오다>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제가 먼저 알고 찾아드네
소 등에 피리 소리 황혼을 노래하며
고운 가락 장단 맞추어 온 누리에 울려 퍼지니
마을 사람 모두 나와 화답하며 반기네
7. 마침내 소를 얻었다는 생각마저 없는 자리인 망우 존인 (忘牛存人) <소를 잊다> 마침내 소 타고 집으로 왔네
내 마음 끝없이 편안하고 소 또한 쉬니
온 집에 서광이 가득하여라
초가삼간에 근심 걱정 없으니 내 마침내 채찍과 고삐를 내버리네
8. 소를 얻은 사람조차 없으니 얻은 소도 없는 인우구망 (人牛具忘) <나도 소도 다 잊다> 회초리도 밧줄도 소도 나 자신까지도 모두가 공하여 느낌이 없네
넓고 넓은 이 하늘 끝도 가도 없어서
티끌 하나도 머무를 곳이 없네
내 마음이 이와 같으니 무엇엔들 걸리리
9. 소도 사람도 없으니 그대로 본래 그 자리인 반본환원 (返本還源) <근원에 돌아오다> 이 뿌리에 돌아오기까지 숱한 고개를 넘고 넘었네
이것이 참된 나의 거처 그 모양 허공과 같아서
막힘도 트임도 없으니 시냇물은 졸졸 흐르고
꽃들은 마냥 아름답고나
10.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니 다시 거리로 나서는 입전 수수 (入廛垂手) <골목에 들어 손을 드리우다> 비록 누더기를 걸쳤어도 언제나 모자람이 없고나
길거리와 장터에서 뭇사람과 섞인 채 그들의 고통은 절로 사라지니
이제 내 앞에서는 죽은 나무도 살아나는구나
깊은 골에 물줄기도 젖지 않는다 하리
(십우도 설명 : 네이버 블로그 '돌중 doljung'에서 가져옴)
열 마리의 소가 사성암을 찾았다는 것은 인간들이 본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개발우선주의와 물질만능 주의에 젖어있으면서 본성을 회복하려는 각성조차 없는 시람들, 그리고 멈추지 않는 자연재해와 잡히지 않는 전염병, 그로 인해 동물들이 당하는 고통이 또한 클진대 위급한 상황에선 자신들만 먼저 살기 위해 취하는 사람들의 행동에서 인간적인 순수함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사람들을 공격하는 코로나사태에 인간들의 대처법을 보면서도 소들은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전의 소나 다른 동물들의 감염병에 대해서 인간들이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면 말이다.
인간의 본성을 찾는 과정을 그린 그림 십우도의 주인공인 소, 말 못 하는 그들이 자신들의 말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사찰로 가는 것뿐이었으리라.
"인간들이여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십우도의 의미를 기억해 주세요. 본래의 마음자리를 돌아보고 우주와 자연과 인간과 동물이 함께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주세요. 우리도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라는 소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