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호(號) 이야기
내게 자신감이 되어준 호(號), 曉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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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1. 2020
호(號)란 동양의 유교문화권에서 본명이나 자(字) 외에 이름 대신 허물없이 부르기 위해 지어진 아호(雅號), 당호(堂號), 별호(別號)를 가리키며 기원은 중국 당나라 시기까지 올라간다.
핏줄을 중요시하던 전통시대의 습관에 익숙한 우리는 지금도 뿌리를 잇는다는 의미로 태어나서 처음 집안의 돌림자를 따라 본명을 가지게 된다. 물론 태어나기 전부터도 태명이라 하여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 불리던 이름도 있다. 그러나 정식 이름은 태어나 처음 받아 호적에 올리는 그 이름일 것이다.
이름에 대해서 전통시대에는 그 사람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임금이나 고위 관직자들 에게는 피휘(避諱)라 하여 본명을 부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본명을 함부로 부를 수 없으니 당연히 그 사람을 지칭할만한 이름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것이 호(號) 사용의 일반화를 이어온 관습이 되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불리게 되는 호는 재능이나 성격에 따라 여러 개를 가질 수 있었다. 성년식을 치르면서는 字를 받게 되어 이때부터는 공식적인 이름으로 字를 이름 대신 사용해왔다.
조선말 학자 추사, 김정희는 503개의 호를 가졌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인물 중 가장 많은 숫자라고 한다. 김정희가 많은 호를 가지게 된 환경을 살펴보면, 시-서-화에 두루 재능이 많았던 김정희에게 스승과 친구, 선배 등이 자신들이 김정희를 보는 관점에서 부르기 편한 이름을 지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속설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친구를 방문할 때 빈손으로 갈 수 없어 호를 지어 방문했고, 호를 받은 이는 거나한 술상을 답례로 대접하기도 했다는 말도 있다. 그 시대에 가장 많은 호를 가진 김정희는 인간관계가 꽤나 좋았을 것으로 판단되기도 한다. 이름 앞에 호를 붙여 'ㅇㅇ아무개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들이 참 멋있게 보였다. 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학식이 풍부한 특별한 인물로 우러러 보였다. 그렇게 느꼈던 것은 전통시대에는 한학을 공부한 양반, 선비, 학자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얼마 전에 절대로 호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분의 이야기를 듣고 호의 사용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내게 멋지다는 생각을 갖게 한 호사용의 여부는 개인적인 것이지만 호를 지어준 누군가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기분 좋게 사용하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이다. 물론 너무 많아서 다 사용할 수 없는 경우는 제외하고 말이다. 내게는 호 사용에 대해서 아주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과정들이 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불러 주는 흔한 별명 하나도 없이 너무도 평범한, 아니 평범하기보다는 평범 이하의 삶을 살았던 나에겐 호라는 건 가당치도 않았고 생각도 못했었다. 젊은 시절, 내 삶이 끝없이 힘들기만 해 답답할 때는 철학관이나 점집을 다녔었다. 그때 듣게 된 이야기가 “사주하고 이름이 안 어울려, 사주는 어쩔 수 없지만 이름이라도 바꾸지 않으면 평생 그렇게 고생을 해도 편할 날이 없을 거야”라는 말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이름만 바꾸면 팔자가 필수도 있다는 말로 들렸다. 덧붙여 내 사주에 火가 많으니 불이 잘 탈 수 있도록 나무가 들어간 이름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안 들었으면 몰라도 들은 이상 모든 순간마다 내 사주와 이름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내 본명에는 나무는커녕 오히려 물을 표현하는 삼수변(氵)이 들어있다. 그러니 불이 잘 타기보다는 피우지도 못할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개명이라는 것은 제도적으로도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고, 고지식한 친정아버지의 찬성을 끌어내지도 못하였으며, 작명소에서 좋은 이름을 받으려면 꽤 많은 돈이 들어간다고도 들었다. 개명할 조건을 충족시킬만한 환경이 될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이름만 바꾸면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데 그 정도도 못하는 신세가 한스러웠다.
어느 날 나는 스스로 옥편을 뒤졌다. 나무를 표현하는 의미가 들어간 글자를 몇 개 찾아놓고 성과 어울리며 부르기 편한 이름을 조합하다 보니 ‘나무수樹 수풀림林’이라는 이름을 만들 수 있었다. 나무가 숲을 이루었으니 더 이상 많은 나무는 있을 수 없을 것 같았고 '수림아!' 또는 '수림 씨!' 그리고 '강수림 씨!' 하고 누구나 불러도 부르기 편한 이름이었다. 나는 '수림(樹林)을 나의 호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스스로 호를 정한 후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樹林'으로 불러 주기를 부탁했고 혹시라도 나무樹자를 물水자로 상상하며 부를 것이 염려되어 “수림 할 때 수자는 나무수입니다”하며 설명까지 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이름 대신 수림이란 호로 불러주길 바라며 내 호를 사용한 지 10년이 되어가던 즈음에 부천의 어느 대학교수이신 한 분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고 그분께도 당연히 내 이름과 호를 소개하며 인사를 했다. 물론 '나무 수예요'라는 설명을 잊지 않고...
교수님은 내가 자기소개를 할 때 나무수를 강조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호를 가지게 된 이유를 물어오셨다. 본명이 사주에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여 가지게 된 이름이라고 설명하였고 무심히 지나갔다.
그분은 해마다 연말연시에 직접 제작한 글과 그림을 전체 메일로 보내오시며 안부를 묻고 일 년의 평안을 기원해 주셨는데 어느 날은 전체 메일이 아닌 개인 메일로 한통이 수신되어 있었다. 그분은 내가 40대에 맞이한 용띠해에 당신이 공부한 내용을 토대로 나의 호(號)를 지어 선물하고 싶다시며 사주를 물으셨다. 이미 수림이라는 이름을 10여 년 정도 사용하고 있었지만 작명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는 스스로가 지은 이름이라 내게 맞게 잘 지은 건지 자신감도 없었고 또 저명하신 교수님께서 무료로 지어 주신다 하니 그 이름이 너무 받고 싶었다. 감사한 말씀을 드리고 사주를 적어 드렸는데 한참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그냥 지나친 말이었구나 싶어 잊고 지내던 어느 날 문자를 보내오셨다. 내 호를 이메일로 보내셨으니 확인해 보라는 거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메일을 확인하니 ‘새벽의 맑은 기운이 세상을 적시며 만물을 소생시키듯이 부지런히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담았다는 이름 두 개가 있었다.
새벽 정원(새벽 효曉, 뜰정庭), 새벽 우물(새벽 효曉, 우물정井).
둘 중 난 ‘새벽 우물(曉井)’이라는 이름을 선택하였다. 뜰안의 작은 규모의 이로운 사람이기보다는 어디까지라도 흘러갈 수 있는 큰 이로움을 펼치고 싶다는 거창한 포부가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아버지께 "저 그런 이름을 받았어요" 라며 내가 호를 받게 된 과정과 일반적인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불러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니 아버지께서는 서운한 표정을 보이셨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난 딸을 보며 설레는 마음에 고심하며, 딸이 어질고 맑게 살길 바라고 지어주신 그 이름이 좋지 않아서 내가 그동안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했으니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말씀드리기 전에 미처 그 생각까지 하지 못한 어리석은 나의 태도를 후회하기도 하였다. 중간에 호로 사용하지 말고 아예 법원의 절차를 거쳐서 정식으로 개명을 할까도 생각했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의 그 표정이 떠올라서 끝내 개명절차는 시도하지 않았고 소중한 나의 본명은 호적에 그대로 남겨 두었다. 현재는 공적인 상황에선 본명을 사용하지만 사적인 공간에선 효정(曉井)이라는 호로 불리고 있다.
세상일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인지 효정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난 새벽 일찍 일하는 사람이 되어있다. 그리고 세상의 이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미약하나마 사회적 봉사 활동과 정기적인 후원을 실천하고 있다. 태어나면서 받은 이름이 사주와 맞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그 말이 항상 무의식 중에도 남아있으면서 나의 자신감을 위축시켰던 그때와, 내게 잘 맞는다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자신감을 얻어 당당하게 살아가는 지금과 비교해 보면 나의 삶이 확실히 많이 변했다. 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잘난 체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불려지는 대로, 그 이름에 걸맞는 사람이 되기 위한 잠재력을 무의식적으로 발휘한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503개의 호를 가진 것이 그가 시서화에 능해서 받은 것이라기보다는 어쩌면 그 많은 호를 받을 때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생각을 함으로써 그런 인물로 키워진 것이 아닐까?
시를 쓰고 싶다면 시와 어울리는 호를 가지고 더욱 훌륭한 시인이 되고,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그림과 어울리는 호를 지어서 역사에 남을 걸작을 남길 수 있다면, 그리고 글 쓰는 사람들에게는 글과 어울리는 호를 가지고 자신 있게 좋은 글들을 지어낼 수 있다면, 호는 여러 개를 가져도 좋을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만약 본명 대신 자신의 의지를 담은 이름이 있거든 누구나 쉽게 자신의 호를 부를 수 있도록 가는 곳마다 소개하고, 혹시 주변에 본명 이외의 이름으로 불려지길 원하는 분이 계시다면 아낌없이 그 이름을 불러 주자. 이름을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운들을 받을 수 있을 테니 그보다 더 큰 선물은 없을듯하다.
나는 오늘도 '曉井'으로 불려지는 것이 참 좋다.
소외계층을 위해 일주일 네 번씩 밥해주는 단체 '밥드림'에서 봉사하던 모습
정기적인 후원에 감사하다며 매년 달아주시는 어느 법당의 연꽃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