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친구명단을 보다가 한 친구의 프로필 사진을 보게 되었다. 색시와 딸내미와 함께 찍은 행복한 모습의 사진이었다. 초등학교 남자 동창생 사진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어린 시절에 강한 감정을 느꼈던 친구다.
초등 6학년 때였다. 그때는 도시락 검사도 하지 않을 때였는데 집안에 형편이 나아졌는지 엄마는 도시락을 싸주셨다. 도시락만 가져가면 점심시간인 4 교시가 끝나기도 전에 쉬는 시간에 미리 까먹곤 했다. 그날은 어쩌다가 점심시간까지 얌전히 도시락을 가지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미리 도시락을 까먹은 대부분의 아이들은 운동장으로 나가고 집이 가까운 아이들은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리고 도시락을 먹기 위해 교실에 남은 아이들은 나와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은 친구, 부반장과 잘 기억나지 않는 친구 2명 을 포함해서 여학생 4명이 도시락을 꺼내어 마주 보고 앉았고, 한 분단 건너편에는 남학생 2명이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한 명은 반장인 그 아이였고 한 명은 역시 잘 기억나지 않는 친구이다. 그렇게 교실에는 급우 54명 중에 6명이 남아 도시락을 먹으려 하였다. 그 모습이 뭐가 특별했는지 갑자기 창문을 통해 남자아이들 여러 명이 우리를 놀리고 있었다.
우리 여학생들은 "니들 그러지 마~~" 하면서 도시락을 먹고 있다가 멈추지 않고 놀려대는 통에 더 이상 밥을 먹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부반장이 먼저 그만 먹자고 했다. 여학생 3명은 부반장 말에 동의하고 도시락을 덮으려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 아이, 반장인 그 아이가 벌떡 일어나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 니들 다 가만 안 둬 저리 안 가?" 하며 창쪽으로 쫓아가 남자아이들 몇 명을 밀쳐버리고 창문을 모두 닫고 잠가버렸다. 순간 조용해진 교실에선 서로 얼굴만 바라보며 나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우리에게 반장은 말했다. "야 먹어 먹어 괜찮아, 밥 먹던 거 마저 먹어, 재들 또 오면 내가 가만 안 둘 테니까 걱정 말고 먹어"라고 말했다. 그때였던 거 같다. 그 아이가 내 마음에 들어와 버렸다. 안 그래도 부잣집 아들에다 공부도 잘하고 반장이기도 한 그 애를 전교생이 모르는 친구들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아이였는데 우리를 놀려대는 아이들을 혼내주고 곤란한 순간을 모면하게 해 준 그 아이가 얼마나 멋지고 든든하던지...
그 이후 나의 신경과 시선은 그 아이만 향해 있었다. '에이 그 나이에 무슨 사랑이야, 그냥 고마운 감정이었겠지~'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 난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속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새기고 있었다. 나중에 크면 그 아이와의 사랑을 꼭 이루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좌절의 감정을 느껴야 했다. 졸업을 하면서 중학교를 가지 못한 나는 더 이상 그 아이를 바라볼 수 조차도 없게 되었다. 가난한 데다 학력도 없는 나를 그 애는 상대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머리로는 이루지 못할 사랑인 줄 알고 있었지만 가슴속에 자라나는 감정은 점점 더 커져 슬프기만 했다. 얼마 후 서울에 돈을 벌겠다고 가게 되었고, 그렇게 멀리 떨어져 한없이 힘든 상황에서도 순간순간 그 아이가 생각났다. 그 애를 생각하면서 힘든 시간을 견뎌내었다. 그러던 16살 겨울 그 아이가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 다가오고 있을 그때에 동창을 통해 들은 한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절망하게 했다.
2학년 학생들 여러 명이 정학 처분을 받게 되었는데 그중에 그 아이도 끼어있다고 했다. 정학 사유는 일명 '연애편지 사건'이었으며 편지를 주고받은 남녀 학생 모두가 일주일간의 정학 처분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상대가 하필이면 나 4학년 때 우리 집이 세 들어 살던 주인집 딸로 나를 괴롭히며 상처를 주어 평생을 미워하리라 마음먹었던 그 친구였다.
내가 그리도 좋아하던 그 애가 내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만큼 미운 여자애를 좋아하여 편지를 주고받다가 정학 처분까지 받게 되다니 그보다 더 큰 상처는 없을 것 같았다. 질투와 속상한 마음에 며칠밤을 울고 불며 지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다가 우리 또래들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와 일터를 찾아 뿔뿔이 흩어진 후에는 더 이상 그 아이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살았다. 어느 순간 그 아이의 존재마저도 잊고 살던 30대 중반에 고향에서 식당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름아름 동창들이 찾아와 모임도 하곤 했었는데 어느 날도 동창들 몇 명이 오겠다고 하여 예약을 받아놓고 음식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시간이 되어 한두 명씩 동창들이 오기 시작하여 가볍게 인사하며 상을 차리고 있을 때 한 친구가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며 주방 입구에 서서 웃고 있었다. 나의 10대 후반을 살아내는 용기를 가지게 했고, 질투로 아프게 하기도 했던 그 마음속의 첫사랑이 나를 보며 반갑다고 웃고 있는 거였다. 순간 내 가슴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예고도 없이 그 애를 만날 줄은 몰랐다. 미리 알았다면 좀 더 이쁘게 꾸미고 있었을 거다. 평범한 차림에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냄새 가득한 식당 주방에서 첫사랑을 만나다니 그저 얼굴만 화끈거렸다. 식사를 하면서 그날 난 그 애의 색시가 누구인지 물었다. 동창이라고 했다. 더 들을 것도 없이 중학교 때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그 얄미운(어릴 때 세 살던 집의 주인집 딸)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에 난 그 애마저도 미웠다 그렇게 못된 애와 결혼할 정도밖에 안 되는 애를 내가 좋아했었다니 지난날 내 감정들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때였다 옆 친구가 "야 00 이는 잘 지내냐? 같이 오지 그랬냐?" 하고 말했다. "00 이라니? 거기 살던 그 00 이? 그 애가 네 색시야?" 하고 물었다. "응 대학 때 결혼하고 딸이 둘 있다." 세상에 00 이는 초등학교 때 나랑 친하기도 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친구다.
그 친구라면 첫사랑이라 해도, 그 마음이 왕성했던 그 시기였더라도 얼마든지 축하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잘했다고 엉덩이라도 토닥여 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었다. 그 후 그 애와 00 이를 종종 동창회를 통해서 만나고 있다. 물론 그 미웠던 주인집 딸도 지금은 미운 감정 없이 만나고 있다.
어린 시절에, 사랑이 뭔지도 모르던 그 시절에 내 가슴을 떨리게 했던 그 애가 초등시절 서로 좋아했었던 친구와 부부가 되어 이쁜 딸을 둘이나 낳아 키우며 살고 있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다. 카톡 프로필 사진에 활짝 웃는 첫사랑 가족사진을 보며 이 가족이 오랫동안 누구보다도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해 본다.
몇년전 동창모임, 코로나 때문에 올해는 동창회를 하지못했다. 그래서 더 그리운 친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