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대전의 어느 평생교육원에 개설된 글쓰기 반에 등록을 했다. 강좌명은 '글쓰기 으뜸 길라잡이'였고 대학에서 국문학 교수로 정년 퇴임한 전직 교수님이 이끄는 과정이었다. 시와 수필을 중점적으로 수업이 이루어지는 교육과정 중 문학기행 시간이 있었다. 명성이 있는 문학가들의 자취를 돌아보며 문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작품에 담긴 의미 등을 되새겨 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 과정을 수행하기 위해 교육원생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 날짜를 잡고 장소를 정하였다. 이번 기행은 신라 말 문장가로 명성이 높았던 고운 최치원의 발자취를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더불어 고운의 유적지가 있는 충남 보령 관내에 한 번쯤은 만나고 싶었던 조선의 학자, 토정 이지함의 흔적도 함께 돌아보기로 하였다.
보령에 도착하여 먼저 찾은 곳은 토정 이지함이 잠들어있는 묘소이다.
흙집에서 검소하게 살아서 지어졌다는 호(號)가 토정(土亭)이다. 토정의 본관은 한산이며 조선 선조 때 포천 현감과 아산현감 등을 지냈다. 토정은 현직에 있을 때는 몸소 검소한 생활로 백성의 모범이 되었고 걸인청을 세워 빈민과 노인들을 구제하려 힘썼다. 또한 선조 6년에는 임진강의 범람을 예견하여 많은 인명을 구제할 정도로 천문지리, 음양, 수리, 의학, 복서에 밝았다고 한다. 이는 당시 주류를 이루던 성리학이 외면한 민족 학문이었다. 토정의 애민 정신이 명성과 부귀를 따르기보다는 민생들의 안정과 편리함에 더 천착하였음을 의미한다. 특히 그가 지은 토정비결은 앞날이 불안한 서민들이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풀이를 해주어 지금도 해마다 연초에 한 번씩 살펴보는 사람들이 많다. 토정이 살아있을 당시에 토정비결은 너무나 정확하였다고 한다. 좋은 글귀가 나올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좋지 않은 풀이가 나왔을 때는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거나, 해도 안된다는데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며 게을러지기도 하는 등 부작용이 따를 정도였다고 한다. 자신이 지은 토정비결로 인하여 생기는 부작용에 대해 고민을 하던 토정은 말년에 토정비결의 괘를 살짝 바꾸어 놓았다고 전해지는데 그로 인해서 좋은 괘가 나와도 자만하지 않을 수 있고, 안 좋은 괘가 나왔을 때도 그때 괘만 돌려놓지 않았으면 좋은 괘가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어서, 토정비결로 인한 부작용은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의 저서로 인하여 사후에 혹시 생길지도 모르는 부작용을 막을 방도까지 세워 놓았다니, 그 지극한 애민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였으니 여행 중 맛있는 음식은 특히나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다음 여정에 앞서 식당으로 향했다.
창이 탁 트여 넓은 바다의 풍경을 한눈에 감상하며 먹을 수 있는 곳이기를 바라며 도착한 식당은 아쉽게도 바다가 보이는 곳은 아니었다. 다만 바다의 산물로 식탁이 차려지는 곳이었다. 싱싱한 횟감과 각종 조개구이, 주꾸미 샤부샤부까지 무한리필로 제공되는 곳이었는데 휴가철이 아니어서 인지 그다지 붐비지는 않았다. 함께 공부하는 시인님 몇 분의 시사품이 식사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먹고 마시는 순간순간, 즉석에서 짓는 삼행시와 스스럼없이 주고받는 대화조차도 모두 시어처럼 들린다.
식사시간에 고조된 분위기 그대로 다음 일정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의 유적지로 향했다.
고운은 고려말에 태어나 당나라를 유학하고, 당나라에서 벼슬까지 했던 수재였다. 망국의 한을 풀어버리지 못하여 조선 초기에 정치에 뜻을 버리고 삼천리 곳곳을 유람하며 살았다. 우리나라 곳곳에 고운의 흔적이 남겨져 있는 것이 유람의 증거다. 이번에 찾은 고운의 흔적은 보령시의 한 곳, '맥도(麥島)'라고 불리는 곳으로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예전엔 섬이었던 곳이다. 지금은 주변이 논이다. 가까이 바다를 막은 방조제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바다를 막아 논으로 개간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진입로 입구에 '고운 최치원 유적지’라는 팻말을 세워놓아 고운이 그곳의 풍경을 읊은 시라도 한편 만날 수 있을까 기대를 하였지만 그곳에서 지은 시는 없다. 다만 보령시에서 고운이 남긴 유명한 시 한 편을 바위에 새겨 세워 놓았다.
‘秋夜雨中 秋風唯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비 내리는 가을밤, 자신을 알아주는 이 없는 세상을 떠돌면서 잠 못 이루는 깊은 밤에 만리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표현한 시이다. 이 시를 지을 당시는 고운이 당나라에 있을 때였다고 하니 보령의 보리 섬과는 인연 있다고는 할 수 없겠다. 커다란 바위에 1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 또한 고운과는 같은 시기를 산 사람들의 이름은 아니었다. 어쨌든 고운의 유적지라 하여 찾아간 곳에서 고운의 당시 심경을 살펴볼 수 있는 시 한 편을 접하였으니 찾아간 발걸음이 헛되이 여겨지진 않는다. 고운의 유적지에서 단체 기념 촬영으로 마무리하고 나니 시간은 저녁을 향해 있다. 밤이 되기 전에 돌아오기로 한 우리 일행은 그날의 나머지 일정을 접어야 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선 총무님의 사회로 흥겨운 시간이 흐른다. 그룹 대표님의 즉흥시 발표에 시의 언어도 저렇게 순발력을 발휘하는 줄을 알았다. 또한 즉흥적으로 발표되는 짧은 시어들에 생사고락을 다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시인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더욱 커져만 갔다.
새벽까지 일해야 하는 나는 잠을 자지 못해 피로할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버스로 이동 중에 잠시잠시 휴식을 취하면 되리라던 생각으로 참석을 했던 것인데, 그럼에도 문학의 세계에 빠져들어 피로한 줄도 몰랐다. 하루의 생업을 접고 문학기행에 따라나서기까지 많이 망설였던 시간을 모두 잊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평생의 꿈으로만 간직하고 있던 글쓰기의 세계에 한걸음 더 깊이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얼굴엔 홍조가 피어나고 가슴속에선 다듬이질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