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업장은 대전에있다. 취급하는 품목이 바다에서 나는 것들 이어서 완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완도에서 생산되는 물건들을 대전까지 올리려면 배송비가 만만치 않다. 주말을 이용해 직접 실어오기로 하고 남편과 함께 완도를 다니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경치 좋은 곳들 들러서 관광도 하고 지역의 특산물을 사기도 하고 맛집에서 밥도 먹으면서 다녔다. 낚시를 좋아하는 남편은 바닷가에 숙소를 잡고 그 주변에서 낚시를 했다. 남편이 낚시하는 동안 나는 높지 않은 산을 다녔다. 이곳저곳 낚시포인트를 잡아 잠잘 곳을 정하던 남편이 어느 날부터는 완도로만 갔다. 물건을 실으려면 완도로 와야 하는데 한참 손맛을 느껴 아쉬울 때 접어야 하는 것이 싫어서 완도로 오는 것이라 했다. 몇 개월을 다니던 어느 날 코로나 사태가 발생했다. 끊일 줄 모르고 코로나 공포는 퍼져갔다. 누가 잤는지도 모를 방에서 잠자는 것이 불안했다. 탑차의 짐칸에 보온매트와 두꺼운 이불을 싣고 간단한 취사도구도 챙겼다. 노숙을 한것이다. 여름에는 모기 때문에 불편했고 가을이 되니 추워서 불편했다. 코로나는 변이와 변이를 거듭하면서 언제 끝날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정말 가볍게 말했다. “우리 완도에 작은 집 하나 살까?” 남편은 주말마다 완도로 내려와 쉬었다 가는 것도 좋을 거라고 하며 내 말에 적극 동의 했다. ‘그냥 농담이었는데...’ 그날부터 남편은 부동산을 찾아가 적당한 집이 나오면 연락해 달라고 했다. 부동산은 남편보다 몇배는 더 적극적이어서 일주일이면 두세 번씩 전화가 걸려왔다. 집을 보러 다녔다. 가격이 싸면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집이 마음에 들면 가격이 비쌌다. 차라리 빈 땅을 사서 집을 짓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한번 더 보자고 또 연락이 왔다. 남편과 똑같이 기대도 안 하고 불러주는 주소지로 갔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면서 "그럼 그렇지 오죽하면 우리에게까지 연락이 오겠어?" 그렇지만 약속한 것이니 사람은 보고 가는 것이 예의라며 마을 끝까지 갔다. 그곳은 별천지였다. 달마산이 보이는 탁 트인 풍경에 바닷물이 집 앞까지 찰랑거리고 있었다. 빨간 벽돌로 지은 집은 튼튼했고 깔끔했으며 마당도 넓고 텃밭도 적지 않았다. 남편은 집 앞에서 낚시를 하고 나는 텃밭을 가꾸고 꽃들도 심어서 그림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은데!” 감탄하고 있을 때 부동산 사장과 집주인이 나왔다.
집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또 한 번 반했다. 바로 거실과 안방에서 바다와 달마산을 볼 수 있었다. 집주인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집 자랑을 했다. 남편도 들떠서 사자고 했다. “그래도 주말마다 와서 관리하기엔 너무 벅차지 않을까?” 집주인은 뭐 하러 복잡한 도시에서 사냐고 아예 이사를 오라고 했다. 이사만 오면 자기가 고기 잡는 포인트도 알려 주고 갯벌농사에 남편을 끼워주겠다고 했다. 웬만한 도시 수입보다 나을 거라며 설득했다. “당신도 도시생활 힘들어했잖아? 이런 곳에 살면서 글도 쓰고 하면 좋지 않겠어? 이제부터 돈은 내가 벌게” 정말 그렇게 될 줄 알았다.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고 이사날짜를 잡아버리고 말았다. 남편은 자기가 수입이 생길 동안만 대전사업을 유지하다가 2.3년 후에 내려오라고 했다.
이사 간 전 집주인은 전화번호도 바꾸고 연락이 되지 않는다. 이미 3년이 지났지만 남편의 수입은 자기 한입 건사도 못한다. 주말에 온 집에서 글을 쓰거나 낭만을 즐기는 건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큰맘 먹고 긴 여행을 하고 온 지난 토요일에는 내 키만큼 자라 있는 풀들이 집 주변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밥도 먹지 않고 풀을 뽑았다. 덤벼드는 풀모기들 때문에 울고 싶었다. 남편은 돈도 안 되는 고기 잡으러 간다고 일찌감치 나가버렸다. 좋아하던 여행도 맘대로 못하고 3년 동안 왕복 8시간씩 걸려서 완도만 오갔다. 모기에 물려 퉁퉁 부어오른 내 몸은 바보라고 놀리는것 같다. 만약에 그때 이 집을 사지 않았다면, 차라리 그 돈으로 대전에 원룸이라도 한 채 샀더라면 지금쯤은 은퇴하고 월세 받아 좋은 곳 찾아 여행하며 살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모기에게 헌혈하며 끝도 없이 자라는 풀에 치여 살지는 않았을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