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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으로 열린 인생3막

글쓰기와의 만남

by 강현숙

2018년 봄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쉬지 않고 일만 하는 내 생활이 만든 결과라고 했다.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먹는 약 때문에 나는 더욱 우울해졌다. ‘살아도 살아도 힘들기만 한데 차라리 그만 살까?’라는 생각에 빠져 들었다. 그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모르고 너무도 쉽게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발견하고서야 내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다. 의사의 처방만 가지고는 내 병이 고쳐질 것 같지 않았다. 가볍게 등산도 하고 학교 운동장을 지칠 때까지 돌면서 내게 찾아온 못된 이놈을 떨쳐버리려고 했다. 그럴수록 커져만 가는 ‘난 우울증 환자야’라는 울림에 학교운동장을 돌다가 주저 앉기도 했다.


어떻게 살았는데, 부모의 가난으로 인해 중학교도 못 갔지만 검정고시를 보고 방송대도 다녔다. 부모한테 한 푼도 받지 않고도 남매 대학 졸업시켜 제 갈길 가도록 해주었다. 내 집도 가지고 있다. 이만하면 잘 산거 아니야? 더 바랄 것 없잖아? 그런데 우울증 이라니?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하면서 기어이 이겨내고 말리라는 다짐 뒤편에 우울증을 부정하고 싶은 심리가 있었다. 그날도 등산을 가는 길이었다. 한 대학 앞을 지나다 평생교육원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현수막을 보았다. ‘저곳에서 뭐라도 배워볼까?’ 가난 때문에 중학교도 못 가서 인지 난 배움의 열망이 많았다.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아까 보았던 평생교육원에서 내 시간에 맞추어 수강할 수 있는 과목을 찾았다. 마음을 끄는 여러 과목들 중에 유독 글쓰기에서 마음이 멈추었다. 내 이야기를 글로 쓴다면 수십 권은 될 것이다. 그래 소설 한 권 쓰자!


그리고 첫 수업이 있던 날 난 실망부터 했다. 내가 쓰려했던 소설 강의가 아니고 시에 대한 강의라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수강생들은 서로 시인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나만 빼고 서로 안면이 있는 분들이었다. 한마디로 시인 동호회 같은 곳이었다. ‘잘못 왔구나’ 강사님께 질문 했다. “소설 같은 것은 안 가르쳐 주시나요?” 강사님은 소설을 쓰려면 시도 알아야 하니 이번 학기는 시 공부를 하고 가을 학기에 소설 공부를 하자고 했다. 강사님 말씀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바랐던 소설공부는 아니었지만 시를 읽고 생활 수필도 쓰면서 시인님이라 불리는 것에 은근한 품위 같은 것을 느꼈다. 무언가 써서 발표를 하면 모두들 환호하며 박수를 쳐 주었다. 내가 정말 잘 쓰는 줄 알았다. 아니 잘쓰고 못쓰고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 발표해야 하는 글이니 집중해서 썼다. 어느 순간 나는 열정이 넘치는 밝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공부 시작하고 1년도 안 되어 등단을 하라는 강사님의 추천을 받아 등단을 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쓰레기들을 썼다. 그 하룻강아지 같은 무모함이 브런치 작가가 되도록 했고, 조회수가 수만건에 이르며 브런치 메인에도 올라오고, 진짜 유능한 작가님들께서 라이킷 해주고 댓글을 달아주는 것에 내 무모함은 극치를 달렸다. 출간작가라는 그 타이틀이 부러워서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출판사에서 제목도 좋고 내용도 좋다며 부추겼다. 덜컥 자비로 책을 찍어놓고 처참하게 망가졌다. 인세는커녕 창고비 라면서 매달 청구되는 금액이 자존심 상해 모두 받아 집에 쌓아 놓았다. 부끄러웠다. 다시는 글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다시 우울증에 빠졌다. 그러니까 시인이 되고 책을 내는 동안에 저절로 우울증 치료가 되어 있었음을 다시 우울해지려는 그때서야 알아차린 것이다. 또다시 공부를 해서라도 제대로 된 글을 써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역의 동호회나 평생교육원 같은 친목단체 말고 정식으로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었다. 그렇게 찾아 만나게 된 곳이 바로 세종사이버대학이다. 대학의 강의는 글쓰기에 대한 내 눈을 서서히 뜨게 해 주었다. 심봉사처럼 단숨에 눈이 떠진 것은 아니지만 분명 더욱 밝아진 날이 올 것을 믿는다. 우울증 치료가 될 만큼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글 쓰는 사람 이었나 싶다.


열심히 공부만 하다가 끝낼지도 모른다. 인터넷 공간 어디쯤 떠돌고 있을 내 글들에게 끝내 길을 찾아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절망 앞에 특별한 처방전이 되었던 글쓰기가 내 인생 3막을 희망으로 활짝 열어준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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