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짠지 6

업보

by 강현숙

남편은 연애시절 전기설비하는 기술이 있다고 했다. 그때는 전기기술 가진 남자는 꽤나 인기 있는 사람이었다. 서울에 있는 적잖이 큰 규모의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괜찮은 남편 만나 서울에서 살 거라고, 친구들에게 은근히 으스댔었다. 그랬던 남편은 결혼한 후로 한 번도 월급을 가져오지 않았다. 월급날이 되어 생활비 좀 달라면 화를 내고 집을 나가 버렸다. ‘돈. 돈. 돈. 그놈의 돈타령~’이라며 나를 남편이 벌어다 준 월급을 다 쓰고 또 달라고 하는 헤픈 여자 취급을 했다. 남들이 들으면 그렇게 들리도록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사랑도 책임감도 없는 남편, 아버지 무서워 돌아가지도 못할 친정, 제비 새끼처럼 내게만 매달리는 남매, 그 삶이 너무 버거워 나는 날개옷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날개옷을 입고 나선다고 해도 당장 갈 곳이 없었다. 배고파 징징대는 어린것들을 데리고는 어디 가서 일도 할 수 없었다. 하나는 등에 없고 하나는 손을 잡고 시장으로 갔다. 야채 몇 바구니씩 담아놓고 파는 할머니들 옆에서 나도 장사를 했다. 자기들 단골에게 물건을 팔았다고 머리채를 잡히기도 했지만 내 새끼들 배 골리지 않으려면 그 정도는 참아야 했다. 돈을 벌어야 하는 절박함 앞에 30대 초반 여자의 자존심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엄마! 할머니들 무서워 집에 가자!- 하며 우는 아들을 달래며 엎어진 바구니를 바로 놓고 상추, 고추, 오이, 호박들을 손질해서 담아 놓고, 지나는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저것이 보통이 아니네,- 하며 신경전을 벌이던 할머니들이 나중에는 돈이 남게 팔아야지 그렇게 퍼주면 뭐가남냐며 장사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는 판잣집 이나마 가게를 얻어 길거리 장사를 면할 수 있었다.

아이들을 가게 한쪽바닥에 박스를 깔고 재워가며 장사를 할 때 시어머니 시누이가 함께 찾아왔다. 돈 좀 아껴 쓰면 되지 애들까지 고생시키며 뭐 하는 짓이냐고 야단이었다. 무슨 돈? 근근이 장사해서 겨우 몇 푼씩 현금을 갖고 있는 걸 안 남편이 어디 취직해서 첫 출근을 해야 한다며 차비하게 돈 좀 달라고 했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출근한다는 남편, 주머니 돈 떨어져 점심도 굶고 다닐까 봐 꼬박꼬박 차비를 주었다. 애들까지 고생하는 거 안타까워 돈을 좀 벌어오려나 기대를 했다. 그런데 남편이 가는 직장은 하나같이 나쁜 사람들만 모여있는 곳이었다. 나쁜 놈들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다며 한 달을 못 견디고 그만두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런 상황에 남편 벌어오는 거 아껴 쓰고 애들 고생시키지 말라고?! 차라리 굶어 죽으라는 말이었으면 시어머니 앞에서 시누이한테 그렇게 악다구니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신히 단골도 생기고 돈이 조금씩 벌어져 내 새끼들 먹고 싶은 거 못해줘서 마음이 아픈 것은 면할 수 있었다. 은행에 통장을 만들어서 날마다 조금씩 모아가는 재미도 있었다. 그런데, 나하고는 정 떨어져 못살겠다고 며칠씩 집 나가 있던 남편이 한 번씩 와서는 돈을 달라고 괴롭혔다. 돈을 주지 않으면 몇 날 며칠 집안이 시끄러웠다. 뭘 해보고 싶어도 밑천이 없어서 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내가 바라는 건 어디 작은 사업체라도 취직해서 성실하게 일하고 때마다 얼마가 되었던 월급봉투를 가져오는 소박한 남편이었다. 뭘 투자해서 큰돈 벌어오라는 기대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투자금이 없어서 돈을 못 번다니? 투자금만 있으면 한몫 잡아 호강시켜 준다는 남편의 모습에서 나는 항상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기어이 깊이 넣어둔 날개옷을 꺼냈을 때 아버지는 아예 인연을 끓자고 하셨고 아홉 살 아들은 성이 같은 아버지랑 살겠다며 나를 따라오지 않겠다고 했다. 아들을 떼 놓고는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어느 법당의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며 울다가 지쳐 있을 때 부처님의 미소를 띤 스님이 말씀하셨다. “업보로다. 전생의 업보여!” 내가 지은 업보는 전생으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 했다. 전생의 빚쟁이들이 아버지로, 남편으로, 자식으로, 이생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그 빚을 모두 갚지 않으면 다음생도 그다음생도 불행은 이어질 거라고 했다. 빚 갚는다는 심정으로 남편에게 돈을 주고 아들을 잃지 않고 살았다. 다행히도 아들은 우등생이 되어 학기마다 상장을 들고 와 지친 일상에 간간히 단비가 되어 주었다.